6.3-6.5
6.3
제이는 유미에게 동생 윤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집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수현 경감의 집으로 향했다. 이 수현경감이 사는 집은 중앙정부와 주요 기관들이 모여있는 1 구역의 시내 중심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지역으로 제2 구역과의 경계에 가까운 곳이었다. 물론 그 지역은 제이와 같이 대를 이어서 1급 시민을 유지해 오던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던 땅은 아니었다. 중앙정부가 탄생 초기 과도기였을 때 경찰이나 군인과 같은 집단을 양성할 목적으로 특정 부계 유전자를 받아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지금은 그들이 몇 대에 걸쳐서 경찰이나 군인에 적합한 유전자를 가진 최상위층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조상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제1계급 인간이란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유전적인 자립을 하였지만 아직도 그 지역에는 특정 직업을 위해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물론 이수현경감도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제이가 이수현 경감의 집에 들어섰을 때 제이를 맞이하여 준 것은 윤이었다. 윤이는 의외로 이수현 경감의 집에 머무는 것이 편한지 얼굴이 밝아보였다. “오랜만이다. 근데 여기서 보게 되다니 참 기분이 이상하다. 여기서 십 분만 가면 우리가 어릴 적 놀러 갔던 집이 있어. 지금은 내가 쓰고 있지. 그리고 네가 살았던 아버지 집도 있는데 기억하겠지.” 제이는 윤이가 너무 편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과 아버지가 제이의 기억에서 소외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 오면서 그 생각은 나도 했어. 기회가 되면 한 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자유인이잖아. 경감님이 아직 회복이 덜 되어서 방에 누워있는데 인사드려.” 윤이는 제이가 그를 제3 구역의 바에서 몇 번 보았을 때와는 달리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한 모습이어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근데 이수현 경감 님은 어떻게 하다가 다치게 된 거야?” 제이는 윤이의 뒤를 따라가면서 윤이에게 물었다.”우리 바의 계단에서 술에 취해서 넘어지셨어.”
제이는 이수현 경감이 술에 취했다는 윤이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자 이수현 경감은 침대에 누워서 머리 위에 모니터를 보면서 자료를 찾아보고 있었다. 윤이가 제이와 함께 들어오자 같이 보려고 한 것처럼 모니터를 모두가 볼 수 있게 정면에 크게 띄웠다. “누워있는 게 편해서 이렇게 맞이할 수밖에 없는 걸 양해해 줘요. 잘 왔어요. 이 동네는 처음인가요?” “네, 편하게 계세요. 저는 이쪽으로는 처음 와봅니다. 좋은 동네예요. 근데 타박상이 심하신 건가요? 골절이나 그런 것은?” “의사가 진찰해 줬어요. 그냥 단순 타박상이에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뼈가 굵어서 골절은 잘 안됩니다. 대신 근육이 좀 놀랐을 뿐입니다. 곧 회복될 거예요.”
이 수현 경감은 지난번 제이를 만났을 때 보여줬던 준호의 메시지를 모니터에 띄웠다. “윤이 씨에게 보여주고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가 주사장 클럽과 바에 찾아간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윤이는 그 메시지를 보고 별로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제이를 부른 것은 셋이 같이 이야기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예요. 다시 이야기하면 이건 제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윤이 씨는 김준호박사를 만나고 있나요? 만약 만나고 있다면.” 이수현 경감의 말이 길어지자 제이가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그런 거라면 저는 여기 안 왔을 겁니다. 난 준호가 하려는 일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알아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 며칠 전에 제3 구역에 경감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거고요.” 제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이는 중앙정부를 온전히 신뢰하는 입장에서 준호에 대한 친구로서의 최소한의 신뢰만 남았을 뿐 그에 대해 어떤 관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거 내가 너무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군요. 그냥 내 호기심으로 윤이에게 질문을 하고 싶은 것뿐이고 둘이 있을 때 하면 서먹할까 봐 제이를 부른 것입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둘이 있을 때 하겠습니다. 병문안을 온 사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겠죠.”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저는 김준호 박사가 하시는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윤이의 차분한 말투에 듣고 있던 제이와 이수현경감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쳐다보았다. “3년 전 바에서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럼 준호와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제이의 말투는 살짝 퉁명스러웠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하긴 나한테 그런 자세한 이야기를 말할 이유는 없지. 너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도 나니까. 근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형제이고 아버지도 계시고 우리 집안은 1급 시민이야. 너의 행동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 그런 맥락에서 네가 준호를 도와서 어떤 일을 같이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이건 너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너도 속해있는 우리 집안을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해 줘.”
다소 이야기가 무겁게 흘러갈 것을 예상했는지 이수현 경감이 끼어들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요. 일단 이 방에서 나가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도 배가 고프고 또 우리가 서로 좋은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시간은 많으니 윤이의 이야기는 천천히 들어봅시다.” 이 수현 경감이 몸을 일으키자 윤이가 부축을 했다. 셋은 방을 나와서 식탁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이미 식탁에는 간단하게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아마도 윤이가 제이를 위해서 준비한 것 같았다. “ 윤이가 요리 솜씨도 굉장히 좋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렇게 요리 솜씨가 좋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아마도 미각이 뛰어난 것 같아요. 제이도 미각이 뛰어난 걸로 아닌데?” “저는 그저 평범합니다.” 제이가 보기에도 윤이의 요리 솜씨는 뛰어났다. 제이의 아버지도 미각이 뛰어나고 요리 솜씨도 좋았다. 아마도 윤이는 아버지의 그런 부분을 닮은 것 같았다. “좋은 재료가 냉장고에 많이 있었어요. 많이 드세요.” 윤이는 겸손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도 맞았다.
제1 구역에는 청정 지역에서 기른 좋은 식재료들만이 공급되었다. 윤이가 제3 구역에서 평상시 쓰던 재료와는 질이 달랐다. “제4 구역에서 나오는 식량과 에너지를 통제한 다 고해도 우리는 전 세계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어.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세계정부와 공조를 하겠지. 어떤 시나리오를 갖고 있는지 몰라도 준호가 유리하지는 않을 거야.” 이 수현 경감은 혼자 말을 하는 것처럼 윤이가 만든 샐러드를 먹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제이와 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대부분 맞았지만 꼭 그렇게 되리라고 둘은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둘은 이수현경감보다 준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호는 치밀하고 몇십 년 앞을 내다보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최소한 지금 이수현 경감이 말한 부분을 예상하지 못하고 일을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6.4
“그동안 3급 시민들은 몸에 삽입된 칩에 의해서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칩을 통해 들어가는 데이터는 조작될 겁니다. 중앙 정부가 실제의 우리에 대해서는 이제 알 수 없습니다.” 주사장은 클럽 안에 모인 사람들에게 스크린을 통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클럽 안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멀쩡한 정신으로 서서 그 화면을 보고 있었다. 술이나 마약에 취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는 환청에 시달리는 사람도 없어졌고 술이나 마약에 중독되는 사람도 줄었습니다. 물론 나로서는 슬픈 일이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불과 삼 년 만에 거리 예술가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농구장에 아이들이 붐빕니다. 조금 더 기다리면 우리에게 더 좋은 환경이 만들어질 겁니다.” 주사장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박수를 친 뒤 서로 흩어져서 밖으로 나가거나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이영은 카운터에 서서 주사장의 이야기를 듣다가 볼 위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닦았다. 이영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후에 천천히 클럽 안을 가로질러서 복도 끝에 있는 주사장의 방으로 갔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주사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빨리 들어와요.” 이영이 들어서자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십여 명의 사람 중 제니스가 이영을 불렀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이영은 문을 닫고 제니스가 부르는 탁자의 반대편 쪽으로 걸었다. 탁자의 가장 중앙에는 준호가 앉아 있었고 주사장은 탁자의 중간쯤 제니스 옆에 앉아 있었다. 이영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가가 아까 울었기 때문인지 촉촉했고 눈동자는 자신감 없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이영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준호가 큰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3 구역에서 이제는 신생아가 많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데이터는 중앙정부에 전달되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지만 인구수나 출산율 그리고 발병률까지 우리가 희망하는 목표는 거의 다 달성되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환경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제안을 했는데 곧 중앙정부가 협상을 할 겁니다. 그전에 여러분들에게 알려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준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제니스가 저를 대신해서 여러분들과 3 구역을 바꾸는데 의사소통을 하고 의사결정을 내릴 겁니다. 저는 중앙정부와의 협상과 제4 구역에 집중할 것입니다. 다들 제니스를 잘 아실 겁니다. 어떤 사람보다 의사결정이나 정보 분석 능력이 뛰어납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예상했던 내용인지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듣고 있었다. “그리고 주사장이 이제 건강이 안 좋아서 은퇴를 할 예정입니다. 물론 전과 같이 손님이 많지 않아서 주클럽은 거의 사교장소가 되었지만. 그리고 김이영 씨를 다 아시겠죠? ” 준호는 이영을 손으로 가리켰다. “예술가이자 이 주클럽의 매니저입니다. 김이영 씨가 앞으로 예술이나 스포츠에 관련한 사람들을 모을 겁니다. 그쪽 분야 사람들은 제3 구역의 외곽에서 흩어져 소멸되어가고 있지만 적은 숫자라도 남아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세대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우선순위가 많이 밀려서 이제 우리가 복원할 마지막 직업군이 되었지만 한때 우리 조상들 중에는 예술가나 스포츠인들이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김이영 씨 환영합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되겠네요.” 준호의 오른쪽 옆에 앉아있던 김수미 박사가 이영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영은 김수미 박사를 보면서 눈으로 인사를 했다. ”이제 중앙정부와의 협상만 남은 거군요. 아직 그쪽에서 연락이 없나요? 물론 우리의 예상대로 그쪽은 매뉴얼에 없는 일이 발생하면 의사결정이 오래 걸리는 약점을 갖고 있으니 빨라도 일주일은 기다려야겠군요. 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없나요?” 김수미 박사는 준호를 바라보면서 질문을 했다. 그녀의 질문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도 관심 있는 듯이 모두 준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협상 날짜를 정하겠으니 시간을 좀 더 달라고만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중앙정부가 우리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파악된 것은 없을 겁니다. 조바심을 갖지 마시고 느긋하게 기다리세요. 기다리시면 계속 소식이 오는 대로 진행 상황을 업데이트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저는 먼저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준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그를 따라 김수미박사등 사람들이 나갔다. 준호와 그들의 무리가 나가자 방안에는 주사장과 제니스 그리고 이영만이 남았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제는 침팬지 들과 같이 어울려 살아가게 되었군. 정말 죽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인가 봐.” 주사장은 피곤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뒤쪽에 있는 자신의 책상뒤로 가서 술을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침팬지라고 할 수는 없죠. 보기에도 그렇고 말도 잘 통하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죠. 우리의 다음세대는 거의 그들의 시대가 될 겁니다.” 제니스가 주사장의 푸념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영은 제니스의 목소리가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졌지만 그녀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영 씨, 앞으로 여기 클럽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예약 손님도 없을뿐더러 이제는 거의 담소나 나누러 오는 펍처럼 운영되고 있으니. 그보다 맡은 일에 집중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도와줄 일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하고요. 아, 그리고 이건 그냥 개인적으로 하는 말인데 건강한 난자를 제공 가능한 사람들을 계속 찾고 있는 건 아시죠? 난 이미 나이나 건강 상태가 조건이 안되지만 이영 씨는 가능한 것 같은데 한번 테스트를 받아보는 게 어때요? 강제는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너무 아까워서 그래요.” 이영은 결혼이나 2세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의 좋은 유전자를 빼닮은 새로운 생명체와 같이 살아보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 저도 여러 가지 생각 중입니다. 전에 한번 김수미 박사님께서도 권유를 해주셨는데 제가 그럴만한 사람인지 모르겠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혹시 그럼 더 하실 이야기가 없으면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6.5
유미는 승화와 함께 준호의 실험실에서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준호의 실험실은 지하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확장을 거듭하며 성장했다. 마치 개미굴처럼 처음의 실험실이 스무 개의 실험실로 이어져서 확장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지하 실험실은 해저도시의 제2출구 겸 환풍구와 맞닿아 있었다. 유미와 승화가 해저도시의 제2출구를 통해서 제4 구역에 있는 준호의 실험실로 들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해저도시의 제2출구 공사가 이제 막 완성 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해저도시에서 우리 구역으로 직접 넘어왔군요?” 준호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유미와 승화를 보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해저도시의 출구를 통해 여기로 오는 것은 예상했던 대로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고 아직 감시도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시겠지만 지금 중앙정부는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승화는 준호의 의자를 빼주면서 이야기를 했다. “제3 구역에 가신 일은 잘 되었나요?” 유미가 준호에게 물었다. “그쪽은 계획대로 잘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출산율도 좋아지고 중독자들도 줄고 있어요. 제1 구역이나 2 구역만큼은 아니라도 그들의 수명은 좀 더 길어지고 건강도 점점 좋아질 겁니다. 이미 반쯤은 시스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봐도 좋습니다.” “역시 잘 되어가는군요.” 유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음은 해저도시 차례입니다. 물론 그곳은 아직 제3 구역처럼 중앙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구역이 아니라 쉽지는 않겠지만요.” 준호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유미와 승화를 보면서 말했다.
“물론 저희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박사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고요. 근데 해저도시의 제2출구에 대한 활용전략을 이제는 좀 더 구체적인 논의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승화는 준비한 자료인 듯 스크린에 해저도시와 제4 구역으로 연결된 제2출구의 입체 구조도 영상을 띄었다. “현재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통로는 세계의 원통이 하나의 원통으로 묶인 구조로 뚫려 있습니다. 물류 운반 통로 이외에 아직 가동하지 않았지만 두 가지 통로로 더 사용될 것입니다. 지열을 운반하는 에너지 통로와 청정공기를 운반하는 공기 통로입니다. 시스템 테스트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년 뒤 해저도시의 거주지역에 사람들의 이주가 완료되기 전까지 테스트를 마칠 계획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먼저 이곳을 차지하는 게 어떨까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의사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는 게 인간의 강점이라고 박사님께서 늘 말씀하셨죠. 저는 그걸 한번 해저도시에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승화는 준호와 유미를 바라보면서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의 눈빛은 행복해 보였고 무엇보다 얼굴은 붉은빛을 띠며 상기되어가고 있었다. 준호는 승화의 이야기를 듣고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역시 승화는 참 도전적이야. 그래서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그럼 계획을 계속 이야기해 봐요. 난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요.” “지금 기존의 로봇 관리업체가 한참 관리 룰을 짜고 있습니다. 그 룰을 교육시키는 방대한 자료를 해킹하는 겁니다.”
“쉽지 않을 텐데요,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원하는 결과가 나올지 보장되지 않아요. 우리는 대신 룰이 해결 못하는 문제를 계속 던져서 룰을 마비시키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건 시간이 좀 걸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아무튼 만약 가능하다면 새로운 방법도 시도해 보세요. 결국 룰을 지배하는 룰을 만드는 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우리 쪽에서 도움을 줘야 할 게 있다면 언제든지 요청하세요.” 준호는 보다 차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승화에게 충고했다. 그는 승화의 의욕을 북돋아 주고 싶었지만 동시에 너무 서두르는 것은 지양시키고 싶었다. 너무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이다. “룰이 만들어지는 알고리즘을 알아낸다는 것은 해저도시를 모두 알아내는 것과 같죠. 그걸 해킹하기는 어려워도 학습시키는 자료를 해킹하는 것은 그보다는 쉬울 거라 생각합니다. 일이 계속 진전되면 공유하겠습니다.”
승화를 보면서 유미가 불평하듯이 말했다. “모든 우리의 과거 자료들이 속속 비밀화되어 버리니 우리에게 남는 건 머릿속에나 있을까?” “ 선배님, 제가 하려는 게 바로 그겁니다. 저는 머릿속에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무슨 소리예요?” 유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승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이 기록되고 그 모든 것이 다시 룰을 학습시키는 데 쓰이고 있죠. 우리의 모든 활동을 기억 속에서 복원시켜서 데이터화하려는 겁니다.” “기억을 복원한다. 뇌를 건드려야겠네요. 그리고 그걸 다시 디지털화해야겠군요. 그 이야기를 언젠가 김수미 박사로부터 들은 적이 있어요. 물론 나의 뇌의 일부도 칩과 연결되어 있어서 지금 데이터화되고 있죠. 혹시 지금 도움을 받고 있는 전문가가 있나요?” 준호는 흥미 있는 표정으로 승화를 보면서 말했다.
“저는 과거의 자료 복원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과거 자료를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개인이 자료를 소유하고 있죠. 아시겠지만 중앙정부는 정보의 분산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근데 제가 만난 사람 중에 과거 자료를 굉장히 많이 소유한 사람이 있었어요. 물론 책이나 메모리칩과 같은 물리적인 자료도 있었지만 그 사람은 좀 달랐어요. 사람들의 기억도 모았다고 했습니다.” “혹시 그 사람이 뇌신경외과 의사입니까?” 준호가 승화에게 물었다. “엔지니어입니다. 짐작일 뿐입니다. 제가 접근을 할 수 있는 건 그 사람과 무선대화입니다. 정확히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들의 기억도 자료화해서 남겨두었어요. 근데 거기에는 과거 룰베이스 정부를 만들던 일에 관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 다 파악해보지는 못했지만 그 데이터들을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제가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실력이 안 되는 것과 그분이 이제 나이가 많아서 죽음의 날을 곧 예약할 거라 시간이 많이 없다는 겁니다.” “오늘 온 진짜 이유가 이 문제에 대해서 도움을 얻으려고 온 거군요?” 유미는 옆에 앉은 승화를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으로 물었다. “ 일부러 선배님께 이야기 안 한 건 아닙니다. 저도 그분이 최근에 알려줘서 알았고 기억을 저장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확인을 먼저 해보느라 말을 안 한 겁니다.” “어떤 식으로 그걸 확인했다는 건가요? 그게 사실인지는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확인해 줄 수 있지 않나요. 그들은 모두 죽었을 텐데요.” 준호는 승화의 이야기에 관심이 가고 몹시 흥분되었지만 다소 침착한 낮은 목소리의 차분한 어조로 천천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