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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Oct 19. 2024

불멸의 꿈

4.5-4.7 5.0

4.5

윤이는 준호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주사장을 통해 들었다. 주사장은 준호를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윤이는 주사장이 말하는 병원은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는 병원이 아니라 주클럽 건물의 최상층이란 것을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았다. 주사장의 건물에는 과거 의학이 가장 번영을 누리던 시기에 있던 의료장비들이 모두 남아있었다. 주사장이 그의 아버지에게 모두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할아버지와 같이 알코올 중독으로 장기가 많이 망가졌는데 그래도 오래 살기 위해서 건강한 장기를 이식받는 수술을 했다. 중앙정부는 3급 인간들의 몸속에 칩을 이식하고 그들의 건강정보를 관리하고 있었지만 주사장 아버지의 수술은 알지 못했다. 이식된 칩에서 나가는 정보를 조작하여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주사장은 충동적이고 욕심 많은 3급 시민인 아버지의 유전자뿐 아니라 과거의 의료 유물과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 사람들은 주사장과는 달리 유전적으로 1급 시민이지만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사장이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윤이는 준호의 침팬지 유전자 변형 프로젝트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준호가 예정대로 곧 죽게 된다면 준호의 뒤를 이어서 그 프로젝트를 이끌고 싶었다. 준호가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실험은 계속되겠지만 윤이는 그 안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의도대로 새로운 시나리오의 기획과 실행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준호가 만약 뇌이식 수술을 받아 성공한다면 윤이의 계획은 틀어지게 되어있었다. 윤이가 아는 지식으로는 과거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인간은 여러 가지 이식 수술을 통해 생명을 연장했다. 그것은 계속 성공률이 높아졌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건강한 장기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자신의 장기를 이식의 목적으로 기르기도 했다. 하지만 감정을 통제하면서 현재는 공식적으로 폐기된 의료기술이었다. 더구나 사람의 뇌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많고 장기처럼 재생산을 할 수없었다. 윤이는 준호의 뇌수술에 대해 반쯤은 실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공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윤이는 계획을 세워놔야 했다. 


준호에게 갑작스러운 암의 발병은 그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가는 느낌을 주었다. 더구나 예정된 죽음보다 훨씬 앞당겨진 죽음이라 그에게는 좌절감과 분노가 같이 몰려들었다. 그것을 통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주사장과 김수미박사는 뇌종양 수술과 더불어 뇌이식 수술을 권유했다. 뇌종양 수술은 이미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도 권유받았지만 수술 후의 상태 때문에 준호가 거부했다. 그의 종양이 자리 잡은 전두엽부근의 손상으로 사고력이 저하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손상된 전두엽의 일부분을 대처할 수 있는 컴퓨터 칩을 이식받는다면 정상생활이 가능하다는 김수미박사의 설득이 준호에게 다가왔다. 


자신의 전두엽의 일부분은 저하되더라도 그와 협업을 할 수 있는 더 나은 기억과 사고력을 가진 프로세서의 이식에 성공한다면 자신에게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수술이었다. 단 한 가지 수술이 실패로 끝났을 때 수술 전의 약속대로 자신을 안락사시켜 주면 다행이지만 자신을 실험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한다면 준호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리스크였다. 주사장과 김수미 박사를 신뢰한다면 그들에게 뇌를 맡겨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준호는 자기 자신이 침팬지와 같이 실험의 대상으로 쓰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준호는 윤이에게 이것에 대해서 논의하고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는 윤이라면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쓰는 것을 막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준호는 주사장의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고 나서 윤이의 바로 향했다. 주사장과 제니스가 윤이를 불러오겠다고 했지만 준호는 윤이의 바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고 혼자 나섰다. 준호가 윤이가 일하는 바로 가고 있을 때 윤이는 준호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바의 출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이는 멀리서 준호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그의 형도 저 나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어릴 적에 떠나온 집과 형의 모습이 먼 옛날이야기처럼 아득하게 기억났다. 그사이 준호가 다가와서 윤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 때문에 나와있는 건가요? 잘 지냈어요?” 윤이는 준호가 생각보다 건강해 보여서 살짝 놀랐다.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가요?” “괜찮으니까 이렇게 돌아다니죠.” 윤이는 앞장서서 바로 걸어 들어갔다. 준호는 윤이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바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날 때 윤이가 뒤돌아 서면서 준호에게 말했다. “계단이 가파르니까 조심하세요.” 준호는 윤이를 몇 번 보지 않았지만 그의 친절함에 오랫동안 봐온 친구처럼 느껴졌다. 바 안에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탁자들과 의자들이 한쪽으로 모두 치워져 있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영업을 안 하나요?” “며칠 휴업에 들어갔어요.” 윤이는 카운터에 있는 쪽으로 가서 의자를 빼서 준호에게 앉기를 권했다. “음료수라도 드릴까요?” “아닙니다. 제 옆에 앉으시죠. 오늘 제가 온 이유를 이야기할게요.” 윤이는 준호의 옆에 앉아서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저는 이제 점점 종양의 크기가 커져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죽음을 예약하거나.” 준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머리가 아픈지 인상을 조금 찡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윤이 씨에게 부탁드릴게 하나 생겼어요.” “어떤 부탁인데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기꺼이 해보겠습니다.” “제 종양이 전두엽부근에 있어서 수술 후에 기억력이 떨어 질지도 모릅니다. 그 부분을 칩에 이식시켜서 보전하면 수술 후에도 제 뇌가 전과 같을 수가 있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고 수술을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근데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만약 수술이 성공적이지 못했을 때, 저를 그냥 죽여달라는 겁니다. 실험의 대상이 되기는 싫습니다.” 윤이는 준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수술은 야심 있는 의사라면 큰 관심사가 될 수도 있겠군요.” “맞아요. 그래서 혹시 수술이 실패하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뭔가 다른 시도를 할 수도 있어서 윤이 씨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수술 이후에 저의 존엄성을 지켜달라는 겁니다.” 윤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준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4.6

제이와 이수현 경감은 소나무 숲에서 삼십 분째 준호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차 안에서 보기에는 산과 이어져 강으로 둘러 쌓인 작은 섬이라 금방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내려서 걷다 보니 섬은 무척 컸다. “저 위쪽 바위 부근에 나무가 없는 쪽으로 가보죠.” 제이는 이수현 경감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바위 쪽으로 다가 갈수록 바위는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뒤쪽에도 다른 바위가 있어서 작은 바위산처럼 보였다. 바위에 다가가자 바위 뒤쪽으로 바위 사이에 작은 틈 안쪽으로 출입문이 보였다. “여기 문이 있는데요.” 이수현 경감이 문을 먼저 발견하고 뒤에 오는 제이에게 소리쳤다. 이수현경감은 문 주변을 살피고 바위틈새에 카메라가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수현경감은 뒤따라오는 제이를 데리고 바위 쪽에서 나와 소나무 뒤편으로 갔다. “저 문 앞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제이는 당황해서 물었다. “음, 저도 지금은 생각나는 게 없네요. 저기에 김준호박사가 머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누군가가 만든 곳인지 어떤 정보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일단 위험한 어떤 장치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기 들어가 볼까요?” 제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일을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제이의 반응을 보고 이수현경감이 다시 말했다. “제가 보기에 저기에는 위험요소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접근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제가 혼자 좀 더 살펴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세요.”


이수현경감은 제이를 남겨두고 다시 바위 쪽으로 갔다. 바위 사이로 들어가서 문쪽으로 다가가 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 보았다. 생각보다 문은 견고하게 닫혀있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물리적인 힘으로 철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문 위쪽에 달린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만약 김준호 박사가 안에서 그를 보고 있다면 문을 열어 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일분쯤 그렇게 출입문 주변에서 서성였으나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수현 경감은 포기하고 제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제이가 다가왔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이곳이 준호가 있는 곳이라면 우리를 보고 문을 열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현재 안에 준호는 없거나 이곳은 준호가 머무는 곳이 아닌 겁니다.” 이수현 경감도 제이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바위 반대편 저 둔덕 뒤를 한번 둘러보고 가시죠. 여기 말고도 입구가 또 있을 겁니다.” 경감은 앞장서서 바위 주변의 둔덕을 살피며 돌았다. 소나무 숲의 바닥은 솔잎이 푹신하게 쌓여 있어서 감촉이 좋았다. 경감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서 솔잎이 깔려있는 바닥을 손으로 더듬었다. “이쪽은 사람이 지나다닌 발자국도 있네요. 그리고 저쪽 공간에 차를 세웠던 흔적도 있고. 발자국이나 타이어 자국이 솔잎에 깔려 있는 것으로 봐서는 사람들이나 차가 지나간 지 며칠은 흐른 것 같습니다.” 경감은 둔덕 아래 소나무들이 없는 평지를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제이가 멀리 서봐도 그쪽 땅 위에는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때 이수현 경감이 바퀴자국이 있는 곳에서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여기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경감은 뒤에 오는 제이를 향해 돌아서서 자신의 오른손 손바닥을 제이를 향해서 보여줬다. 잠시 후 제이가 다가와서 경감의 손바닥을 보았다. 손바닥 위에는 작은 병에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약인가요?” 준호는 약병을 보면서 물었다. 경감은 자신의 손목에 있는 스케줄러로 약병을 스캔했다. “성분 분석으로는 코카인입니다. 마약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3급 시민입니다. 여기 3급 시민이 다녀갔거나 아니면 3급 시민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다녀간 겁니다. 혹시 김준호 박사가 평소에 마약을 복용하지는 않았나요?” “그럴 리가요. 준호는 절제력이 굉장한 친구입니다. 병세가 악화되어서 진통제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 이수현 경감은 주변을 더 둘러보았다. “여기 발자국들도 조금씩 흔적이 남았는데 최소 두 명 이상의 발자국이 보이네요.” 제이는 이수현 경감이 하는 말을 듣고 잠자코 있었다. “우리가 찾아갈 데가 생각났어요. 어서 가시죠.” 주변을 살피고 있던 경감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이 서둘러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제이는 영문도 모르고 걸음을 빨리하여 그를 따라갔다. 이수현 경감은 숲을 걸으면서 주머니 속에 약병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가 약병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은 주사장이었다. 마약과 관련해서 주사장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주사장에게 물어보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수현 경감을 따라가면서 제이는 준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히 준호는 야심 만만하고 자기 절제력이 뛰어난 친구였다. 마약을 복용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제이는 이수현 경감이 발견한 마약이 준호의 것이라면 그가 앓고 있는 병이 상당히 진척되어 진정제가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4.7

이영은 평소와 같이 클럽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근에 주클럽의 바에 손님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이영의 일도 점점 바빠졌다. 이영은 바텐더를 도와서 바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고 바닥 청소도 해야 했다. 이영이 한참 땀을 흘리면서 바닥 청소를 하고 있을 때 클럽의 출입문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이영이 클럽 입구의 데스크에 가서 출입문 감시티브이의 영상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지난번에 한번 보았던 경찰과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보였다. “어떻게 오셨나요? 지금은 영업시간이 아닌데요. 사장님과 약속이 있으신가요?” 이영이 인터폰으로 물었다. “ 이수현 경감입니다. 주사장에게 제가 만나러 왔다고 전해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영은 주사장에게 호출 메시지를 보냈다. 주사장은 요즘 클럽에 잘 안 내려와서 이영도 얼굴을 본 지가 오래되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주사장이 제니스와 함께 내려왔다. “문을 열어 주세요.” 주사장은 감시 티브이의 모니터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라고 허락했다. 잠시 후 경감과 제이가 클럽 안으로 들어왔다. 주사장은 이수현 경감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제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면서 경감에게 물었다. “근데 같이 오신 이 잘생긴 분은 경찰 동료분이신가요?” “아, 네 맞아요. 조사할 게 있어서 같이 다니다가 오게 되었어요.” 주사장은 제이를 힐끗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떡이며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이도 주사장에게 짧게 인사를 했다. “근데 오늘 우리 클럽을 약속도 없이 갑자기 오신 이유가 있나요?” 주사장은 왠지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을 텐데 여전히 출입구 앞의 데스크 주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물어볼 게 있어서요. 아, 그리고 시원한 물 좀 한잔 주시겠어요. 돌아다니다가 왔더니 목이 마르네요. 다리도 아프고. 저기 좀 앉아도 될까요?” 이수현 경감은 주사장이 길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 그럼 일단 저 옆에 바에 앉아서 간단하게 이야기하시죠. 영업시간이 다 돼서 간단한 질문이라면 괜찮을 거 같은데요.” 뒤쪽에서 이들을 보고 있던 제니스가 나섰다. 경감 일행이 바 쪽으로 가서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영은 이수현 경감 일행이 바 쪽으로 가는 것을 유심히 보면서 제이의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어 보여서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영은 제이의 얼굴이 윤이와 거의 흡사하고 그의 목소리는 더욱 윤이와 흡사하다는 것을 금방 깨닫지 못했다. 한편 주사장은 혹시 이수현 경감이 자신이 운영하는 병원에 준호가 와 있는 것을 눈치채고 온 것인지 의심스러워서 경감의 얼굴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이수현 경감도 왠지 오늘따라 주사장이 뭔가 자신을 경계하는 눈빛이 강한 것 같아서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물을 마시면서 시간을 끌었다. “아, 물 맛이 좋은데요. 이게 어디 물이지요? 여기 사람들은 우리보다 좋은 물을 마시는 거 같은데요.” 이수현 경감은 괜히 물이야기를 하면서 주사장과 제니스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히 둘은 다른 때와 달리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갈증이 풀리셨으면 이제 제게 하고 싶은 질문을 하시죠. 영업시간이 다가와서요.” 주사장이 이수현경감을 재촉했다. 그러자 경감은 등을 의자에 기대고 잠시 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 주먹을 꺼내서 책상의 한가운데 주먹을 놓았다. 이수현경감의 이런 행동은 모두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주사장과 제니스뿐 아니라 옆에 앉은 제이의 눈도 모두 그 책상 가운데의 주먹으로 쏠렸다. 이수현 경감은 천천히 주먹을 핀 뒤 손을 치웠다. 그러자 책상 한가운데에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작은 약병이 놓여있었다. 이수현 경감은 주사장과 제니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약병을 보는 주사장과 제니스의 눈빛이 살짝 놀라는 것 같아 보였다. “이건 코카인인데요.” 주사장이 입을 열었다. “이 지역에서 이건 고가의 약으로 여겨질 텐데 고객층이 있는 곳이라면 몇 군데 안 될 것 같아서 물어봅니다. 주클럽 말고 또 코카인을 어디서 많이 판매하나요?” “이건 우리도 팔고 있는 코카인이에요. 아시겠지만 중앙정부에서 허가한 제약회사 중 코카인을 파는 곳은 세 군데밖에 없고 그중 한 곳에서 나오는 일회분용 코카인이에요. 요즘은 우리 클럽 말고도 3 구역에 있는 대부분의 클럽에서 판다고 보면 됩니다.” 제니스는 이수현 경감을 쳐다보면서 빠르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근데 요즘 이런 코카인을 클럽 안에서가 아니라 외딴곳에 가서 하는 게 유행인가요? 주사장님은 주로 어디서 하시죠?” 경감이 주사장을 보면서 물었다. “자기 방에 가서 하기도 하고 클럽에서도 하고 그건 사람 나름이겠죠.” “제4 구역과 같은 외딴곳에 가서도 하나요?” 경감이 주사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다시 물었다. 그리고 이수현 경감은 주사장이 답변을 할 틈을 주지 않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차,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빨리 들어가 봐야 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바쁜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이도 이수현경감을 따라 일어섰다. 이수현경감은 거침없이 출입문쪽으로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제이도 빠르게 그를 따라갔다.    


이수현경감 일행이 주클럽에서 급하게 나간 뒤에 주사장은 제니스를 보면서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수현경감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러는 것 같아?” 제니스는 주사장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이수현경감이 가져온 코카인이 우리 건가요? 사장님이 혹시 흘리신 건가요?” “난 아닌데. 김준호박사 때문에 약을 가지고 간 건 맞지만 흘린 적은 없어. 그리고 알잖아. 우리는 약을 사서 고유 번호를 지우고 보관하니까 내가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제4 구역이라면 김준호박사의 연구실도 있고. 그 주변에서 찾은 거라면 앞으로 그곳에 가는 것은 삼가야 할 것 같아요.” 주사장과 제니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작게 이야기하는 것을 이영은 멀리서 바라보았다. 주사장과 제니스는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영은 감시 카메라를 통해서 클럽 외부를 보았다. 이수현경감과 제이가 천천히 클럽 외관을 살펴보면서 주차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수현경감이 다시 클럽 출입문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영은 바에서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주사장과 제니스를 쳐다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수현 경감이 다시 오는데요.” 주사장은 이영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 방 쪽으로 빨리 걸었다. “나는 일이 있어서 그만 내방으로 갈게. 제니스가 알아서 상대하고 보내도록 해요.” 이수현 경감은 다시 출입구에 서서 호출을 했다. “두고 가신 거라도 있나요?” 이영이 모니터를 보면서 물었다. 


“저기 주차되어 있는 차가 주사장 건가요?” 주차장에는 이수현경감이 타고 온 차 외에 주사장의 차 말고는 주차되어 있는 차가 없었다. 이영은 옆에 서 있는 제니스를 돌아보았다. 제니스는 별다른 표정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이영이 대답하자 경감은 손을 들어서 고맙다는 표시를 하고 뒤돌아서 사라졌다. “앞으로 저 사람이 다시 오면 나에게 먼저 호출해 주세요.” 제니스는 이영에게 부탁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영은 제니스의 지시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수현 경감과 같이 온 사람은 분명히 많이 본 사람이었다. 이름이 누군지도 모르고 길게 이야기해보지도 않았지만 머릿속에 그의 얼굴이나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영은 사람을 보는 눈이 다른 사람들 보다는 훨씬 날카로웠다. 그녀가 대대로 연극배우 집안에서 물려받은 유전자가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표정등 특징을 관찰해서 그대로 따라 하는 데 능숙했기 때문이다. 이영이 제이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 이수현 경감과 제이는 주차장에서 주사장의 차를 둘러보고 있었다. “바퀴를 보면 흙이 묻었던 게 보이죠. 아까 흙성분을 분석한 것과 여기 주사장의 타이어의 흙성분 분석은 일치합니다. 제3 구역의 이 콘크리트 숲에서 흙이 있는 길은 없으니 주사장의 차는 우리가 갔던 곳을 갔다 온 게 분명해요.”


 5.0

유미는 지친 심장과 몸의 산소포화도의 정상화를 위해서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 했다. 그동안 밀렸던 잠을 자기 위해서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유미는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정오 무렵에 잠이 들었다. 제이가 제4 구역에서 김수현 경감과 준호의 흔적을 찾다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유미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제이는 오늘 갔던 제4 구역의 그 지역을 위성사진으로 보려고 컴퓨터에 접속했다. 제이는 그 위치의 10년 전의 사진부터 현재까지를 계속 추적하면서 비교했다. 위성사진 상으로는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바위의 모양이나 주변의 나무들이 크게 변화한 모습이 없었다. 제이는 모니터를 보다가 지쳐서 등을 의자에 기대고 기지개를 켰다. 하루동안 너무 많은 경험을 한 제이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특히 제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3 구역을 가본 것이 그에게는 많은 잔상을 남겼다. 3 구역에서 처음 보았던 허름하고 지저분한 거리들과 불쾌한 공기가 아직도 제이의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더구나 그가 처음 가까이서 마주 대했던 3 급 사람들의 불안한 표정과 웃음기 없는 얼굴도 잊히지가 않았다. 


만약 윤이가 3 구역에서 오늘 봤던 사람들과 살고 있는 거라면 윤이는 무엇 때문에 그런 곳으로 가서 살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번 이수현 경감이 아버지에게 3 구역에서 윤이를 본 것 같다고 이야기했을 때도 윤이가 그런 곳에 가서 살 이유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이수현경감이 가져온 유전자 검사를 직접 한 제이는 그게 윤이의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윤이를 찾지 않았다. 윤이를 찾았을 때 어떤 동질감도 못 느낄 것 같아서였다. 오늘 제3 구역을 다녀와서 제이는 그 생각에 확신을 더 하게 되었다. 


제이가 윤이의 생각과 제3 구역의 잔상으로 골똘히 모니터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유미가 뒤에서 다가왔다. “언제 온 거예요? 내가 너무 깊게 잠들어 있었나 봐요. 당신이 온 줄도 몰랐어요.” 제이는 유미의 소리에 잠에서 깬 듯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많이 피곤할 텐데 더 자요. 나도 조금 있다가 잘 거예요. 오늘은 나도 많이 피곤한 하루였어요.” 유미의 눈에는 제이의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제이가 이수현 경감과 동행에서 준호의 행방에 대해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준호 씨 행방은 찾지 못했나요?” “그건 이야기하면 길어요. 내일 이야기해 줄게요. 오늘은 나도 너무 피곤해서 그만 쉬는 게 좋겠어요.” 제이의 표정에서 피로가 묻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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