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세상에 시선을 고정하면, 괜히 나만 지치고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세상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시선을 밖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생각이 더 유연해지고 감성은 더욱 깊고 섬세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늙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지만, 낡아지지 않는 것도 있다. 바로 우리의 정신이며 내면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를 충만하게 하는 방식을 찾아간다면, 열패감(劣敗感)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런 내면의 시간을 갖기에는 밤만큼 좋은 시간도 없다. 세상의 온갖 소음이 잦아들고, 아무런 방해 없이 나를 나답게 채울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꼭 밤이 아니어도 좋다. 바쁜 하루 속에서도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집중한다면, 밤과 같은 고요한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렇게 하려는 나의 태도와 의지이다. 결국, 내 삶을 밝히는 건 바깥의 빛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해 켜두는 내면의 등불이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 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성 그 자체를 불신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다."
<황현산 _ 밤이 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