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미시마 유키오의 필생의 역작, <풍요의 바다> 시리즈가 완간되었다. 첫 권인 <봄눈>이 출간된 지는 꽤 되었지만, 선뜻 읽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던 것은 나머지 세 권이 언제 번역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번역자가 바뀌면서 마침내 전권이 완간되었고, 나는 이제야 이 긴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사랑의 갈증> 등 다른 작품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 보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작품을 읽기 위한 준비행위에 불과했다. 이제야 비로소 미시마 유키오의 문학 세계가 응축된 <풍요의 바다>라는 깊고도 넓은 강물 속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요즘 여러 일들로 마음이 복잡했는데, 바라건대 이 소설 속으로 푹 빠져들어 나와 내가 처한 상황을 잊을 수 있었으면 한다. 오늘은 첫 번째 작품인 <봄눈>에 나오는 한 장면을 인용한다.
눈송이 하나가 날아 들어와 기요아키의 눈썹에 머물렀다. 사토코가 알아채고는 "어머" 하고 말한 순간, 엉겁결에 사토코를 향해 얼굴을 돌린 기요아키는 눈꺼풀에 전해 오는 차가움을 느꼈다. 사토코가 갑자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그 얼굴이 기요아키의 눈앞에 있었다.
연지를 바른 입술만이 어두운 광택을 발했고 얼굴은 막 발부리에 차인 꽃이 요동치듯 윤곽을 흐트러뜨리며 떨리고 있었다. 기요아키의 가슴은 세차게 고동쳤다. 교복에 높직이 달린 옷깃이 목을 죄어 오는 것을 또렷이 느꼈다.
눈을 감은 사토코의 고요한 흰 얼굴만큼 난해한 것은 없었다. 무릎 덮개 아래로 잡고 있던 사토코의 손가락에 아주 조금 희미한 힘이 더해졌다. 그것을 신호라고 느꼈다면 기요아키는 또 한 번 틀림없이 상처받았을 테지만, 그 가벼운 힘에 이끌려 기요아키는 자연스레 제 입술을 사토코의 입술 위에 얹을 수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 ㅡ 봄눈> (1967년작)
첫 키스의 황홀한 순간을 이토록 섬세하고 정제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다. 장면의 흐름과 감정선, 인물 간의 미묘한 거리감이 그대로 가슴에 스며든다. 읽다 보니 문득, 자연스럽게 첫 키스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아득하고 흐릿하지만, 이상하게 또렷한 감정. 어쩌면 기요아키와 사토코처럼 나 역시 그 순간 가슴이 세차게 고동치고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첫 키스만큼 아련하고 황홀한 기억이 또 있을까. 그 시절의 나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 걸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이런 의문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오랜만에 작품다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세월이 흐리고 나이가 들면 우리는 더 이상 키스를 하지 않는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 나이에?!' 쑥스러워서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키스만으로는 더 이상 설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익숙함이 열정을 무디게 만든 탓인지, 아니면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물이 감정을 덮어버린 것인지, 씁쓸하고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작품을 생의 마지막 시기에 썼다. 다른 작가에 비하면 말년이라고 할 수 없는 젊은 나이였지만, 그는 <풍요의 바다>를 완성하고 자결했다. "내가 삶과 세계에 대해 느끼고 생각해 온 모든 것을 여기에 담았다"는 그의 고백처럼, 이 작품은 그의 문학적 유산이자 세계관의 총결산이다. 그의 문학적 성취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작품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