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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14. 2022

사랑은 전생의 기억을 대신하여 푸르다

얼마 전 '신앙은 불가능한 현실에서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설교를 인상 깊게 들은 적이 있다. 불가능한 현실에서 과연 가능성이 찾아질까? 아주 조그만 희망이라도 엿보이면 그걸 붙잡고 가라는 뜻일까?


무엇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알기 어렵다. 결과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 그 뜻을 선해하면 우리는 과정 그 자체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결과를 떠나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범한 순간을 진주처럼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사람들은 결과로 나를 기억하지만, 나는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일들로 나를 기억한다. 과정이 힘들면 힘든 만큼 기억은 뚜렷이 남는다. 과정을 무시하면 나중에 기억할 것도 별로 없다. 인생에서 그만큼 내 시간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걷는 것만 해도 그렇다. 정상을 바라보면 몇 발자국 가지 못해 금방 지치고 만다. 목적 없이 걷다가 어느 순간 내가 이렇게 많이 걸었나, 벌써 정상인가 하며 놀랐던 적이 여러 번이다. 그래, 때로는 목적 없이 살자, 어제 했던 다짐이다. 그동안 목적 지향적인 내 삶이 행복했던 것만도 아니었다.


사랑에 빠질 때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야지 하면서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냥 사랑하는 거다. 그런 무의식, 목적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나중에 알게 된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했었구나. 그게 사랑이었구나,라고.

신용목 시인의 산문집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중 '사랑은 전생의 기억을 대신하여 푸르다'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나무는 한 생을 그 자리에 발자국 하나를 만들며 서 있지만, 그 생이 끝나면 다시 자신의 몸을 녹여 그 발자국을 지운다. 그것이 나무의 생이다.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영원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다만 꽃과 잎을 태워 촛불 하나를 밝혀놓는 것. 그게 나무의 사랑이다. 끝내 기억하지 못할 전생을 다시 살기 위해 당신과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처럼."


나무는 나중에 한줌의 재로 사라질지언정,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산다. 나무에겐 과정이 목적이고 목적이 과정이다. 한창 초록이 무성한 나무들을 보면서 어떤 면에서는 '나무가 나보다 낫구나' 생각했다. 부끄러움은 이런 것이다.





가끔 묻게 된다.

“도대체 세상은 우리에게 왜 이러는 걸까?”


그래도 우리가 이 세계를 사랑해야 한다면,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서 사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잘못은 이 세계와 멀어지지 않은 채,

세계를 바꾸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네 마음을 돌리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신용목 _ 우리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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