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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23. 2022

속도의 강박에서 벗어나면

장마가 시작되었는지 오후 들어 빗줄기가 거세졌다. 요 며칠 덥고 습해서 잠들기가 어려웠다. 비가 오니 더위가 한풀 꺾일까. 어젯밤에는 산책을 하면서 내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해 생각했다. 1년 전 오늘도 이 길을 걸었는데, 여전히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나', 반복된 일상, 변함없는 삶. 시간이 훅 지나간 것 같다.


그동안 나는 뭘 했을까.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반복은 나에게 어떤 것을 남겼을까.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렇게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흘러갔는지도 모른다. 허무함이 밀려왔다.


습기를 머금어 공기가 무거워진 탓인지 발걸음도 더 무겁게 느껴졌다. 뛰어보지만 곧 숨이 찬다. 최근 산책할 때 음악을 듣지 않고 있다. 걷거나 운동할 때 음악을 들으면 덜 지루할 것 같아서 줄기차게 음악을 들었다. 한편으로 자꾸 딴생각이 들어서 생각을 덜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오랜 기간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걷기 위해 음악을 듣는 건지, 음악을 듣기 위해 걷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점점 음악없이 걷는 것이 어려워졌다. 혹여 마음에 드는 음악이라도 들려오면 거기에 집중하느라 걷는 것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지루함은 피할 수 있었지만, 걷고 나도 머리가 개운하지 않았다.


걷기가 어떤 목적이 될 때 걷는 효과는 반감된다고 한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걸으라는 것이다. 걷는 그 자체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목표를 성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잃게 되는 것도 분명히 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당장은 알 수 없다. 매 순간순간에 충실하는 수밖에.


그래서 결심했다. 걸을 때는 걷는 것에만 집중하자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들은 막을 수 없지만 일부러 잡념을 지우려고 음악에 의존하지 말자고. 걷는 것은 정신과 몸을 이완시키고 긴장을 풀기 위한 건데, 음악을 들으면 오히려 더 긴장하게 된다. 걸을 때는 걷기만 하라는 말은 실천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 시선 처리도 부자연스럽고. 며칠 적응하자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어제처럼 피곤해서 걷는 게 힘들 때도 있지만, 힘들면 힘든 대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생각은 줄지 않았으나, 집으로 돌아올 때는 뭔가 정리가 되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결심한 대로 다 실천할 수는 없지만, 생각이 정리되니 쓸데없는 미련은 점점 줄어들었다.


걷기 위해 처음으로 별도의 시간을 내었을 때, 낮 시간 동안 겪었던 복잡한 일들을 털어버리려는 의도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생각 자체를 피하려고만 했다. 그런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닌데. 생각날 때는 생각하자, 그 생각을 음악이나 다른 수단에 의지해 없애려고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성공회대학교 김찬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속도의 강박에서 잠시 벗어나 심신의 내재율을 회복하는 시공간, 자아와 세계를 찬찬히 응시하는 여백, 그건 '걷기'에 있다. 평생 목발을 짚고 다녔던 故 장영희 교수가 남긴 말이 떠오른다.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더 많이 볼 수 있다.'"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은 걷기 어렵다. 우산을 쓰고 걸을 수도 있지만, 운동화가 젖어 오래 걷기 어렵다. 비가 내리는 기세를 봐서는 아무래도 오늘은 걷기 어려울 것 같다. 할 수 없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세상에는 참 많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게 자연스러운 거다.


오늘밤에는 며칠 전에 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단편이나 읽어야 할 것 같다. 그의 유려한 문장 속에서 헤매다 스르륵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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