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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l 01. 2022

사랑을 잘 못해서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만 벗어나면 덥고 습한 공기가 훅 밀려온다. 잠깐만 걸어도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날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비가 오니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이다. 해를 못 본 지도 벌써 꽤 된 것 같다.


비가 이렇게 매일 오면 비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 있다. 밖에서 일해야 하는 공사장 인부들, 노숙자들... 내가 느끼는 무력감과는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니 습도가 높아 불쾌하다는 내 불만은 쓸데없는 불평 인지도 모르겠다. 이사라 시인의 <폭우>라는 시가 있다.



이 비 개면

무지개 뜨는 행운은 다시 비껴가고

두 눈에 보이는 낡은 것들은 더 낡아가고

두 눈을 벗어나며

날아오른 것들은 더 높게 날아오르겠지


한참을 울던 사람들에게는

등 뒤에서 언제나 감당 못할 비가 온다

떠나면 되는 일처럼 그렇게 날들은 가고



비가 그치면 인간이 만든 것들은 더 낡아지는 반면, 비를 머금은 자연은 초록이 더 짙어질 것이다. 우리도 자연을 닮아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더 성숙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떠나면 되는 일처럼 그렇게 하루하루가 가고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022년 6월의 마지막 날, 1년으로 따지면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간 셈이다. 지나간 시간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비는 하염없이 오는데, 6월의 마지막 밤은 흘러가는데,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젯밤에는 박소은의 '재활용'이라는 앨범의 첫 번째 곡인 <아니어도 돼>를 들었다. 다소 몽환적인 보컬, 처음 듣는 순간부터 익숙한 풍이다.

"지금 그댈 떠올려. 공기 속에 퍼진 그대 숨을 떠올려. 슬픈 위를 덧댄 위로들을 떠올려. 그대의 연인 가족 그런 게 아니어도 돼. 그대 나를 소모해. 지루하게 쌓인 그대 짐을 치울게. 그대 나를 사용해. 널브러져 있던 그대 잠을 채울게. 말주변이 없어서 짧은 글을 적었네. 그림을 잘 못 그려서 사진을 찍었네. 사랑을 잘 못해서 나는 그냥 웃었네."


아마 그녀 또한 누군가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말주변이 없어서 짧은 글을 적다가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도. 그림을 잘 못 그려서 사진을 찍은 것처럼.


사랑은 그 사람을 위해 나를 소모하는 것이다. 시간을 쓰고, 돈을 쓰고, 무엇보다 마음을 쓰는 것이다. 나를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그런 사랑을 했을까. 그녀는 사랑을 잘 못해서 그냥 웃었다고 하지만, 나는 사랑을 잘 못해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더더욱.





사랑하는 행위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자신을 던져보는 일.

그리하여 결국 실패에 닿게 된다.

바로 그 점에서 어떤 사랑이든 사랑은 매우 윤리적인 행위이다.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인간 존재와 삶의 한계를 함께 깨친다.

바로 그 점에서 사랑은 존재와 삶, 우주에 대한 간접경험이다.


<은희경 _ 생각의 일요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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