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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ug 13. 2022

사랑의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사랑

보고 싶은 사람은 여전히 볼 수 없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계속 봐야 하니 인생이 원래 그런 건지, 어긋남이 우리 삶이겠거니, 하고 체념하고 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사랑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의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없을까?


일본 다이쇼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 - 1927), 그는 언젠가 그와 재능을 겨룰 수 있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아마 글을 쓰는 작가였으니 그 여자 또한 필시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으리라. 그녀의 이름은 가타야마 히로코, 아일랜드 문학번역가이자 시인으로 그보다 14살 연상의 미망인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자마자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렸다.


류노스케는 '사랑하는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고시의 여인> 같은 서정시를 지으며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기 전에 그 감정에서 빠져나왔다.'라는 말을 유서로 남겼다. 고시는 지금의 호쿠리쿠 지역의 지명으로 <고시의 여인>은 그곳에서 사는 히로코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다.


바람에 휘날리는 모자가

어찌 길에 떨어지지 않으리

나의 이름은 아쉬울 것 없네

아쉬운 건 그대 이름뿐이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_ 고시(越)의 여인>

그는 고백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왠지 나무줄기에 얼어붙어 있는 반짝이는 눈을 떼어내는 것 같은 애절한 마음이 들었다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느 바보의 일생 188p에서 인용)


류노스케는 그녀에게 더 깊이 빠져들기 전에 그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 방법이 시를 쓰는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 유서에까지 남긴 걸 보면 그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헤어지면 더 이상 그녀의 이름을 부를 일이 없어지니 그게 아쉬울 뿐이라는 고백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는 사랑하는 감정에서 '빠져나왔다'고 하고 있지만 시의 내용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연인에 대한 시 한 편을 쓰는 것으로 사랑의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 뭔가를 쓰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건 글을 직업으로 쓰는 작가는 가능할지 몰라도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와 헤어지면 그 순간부터 그녀의 이름은 익명으로 남는다. 마음속으로 되뇌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입으로 그녀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를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상대의 거부로 헤어졌다면 상처때문에라도 빨리 잊으려고 할 테니 그 시간이 조금 더 앞당겨질 수 있다.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세월의 힘,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 이름마저도 의식 속에서조차 희미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류노스케의 고백과 달리 그가 그녀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이름에 빗대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더는 그녀를 볼 수 없고 이제는 마음에 그녀의 이름만 남았으니, 그게 아쉽다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야 한다는 안타까움 앞에서는 말조차 부질없다. 류노스케의 방법으로는 사랑의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사랑, 절대로 하지 마. 그런데 사랑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뭔가를 사랑하게 될 걸.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 중에서 내가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건 없어.”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 2010> 속 대사. 저항하면 할수록 더 빠져들어가는 것이 사랑이라는 거다. 한마디로 불가항력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대사를 사랑을 해도 힘들고 안 하겠다고 해도 힘드니, 그냥 하게 되면 하는 게 낫겠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였다. 뭘 하고, 안 하고를 마음으로 정하고 나면 그게 집착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물 흘러가는 대로 감정을 놔두는 것이 그나마 나은 방법이라고 영화는 조언하는 듯했다. 내가 나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건 망상에 불과하니까.


사랑하는 감정을 떨쳐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사람이 자꾸 생각나는데 어떻게 그 감정을 버릴 수 있겠는가. 생각을 버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 생각에 사로잡히고 마니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고 살아야겠다는 것,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라면 결론이다.


한때 류노스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히로코, 그도 가고 그녀도 가버렸다. 영화를 찍었던 감독도 이제 나이가 들어버렸다. 배우들도 그렇고, 물론 나도 그렇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 인생은 그렇게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덧없음이 우리 삶의 본질이라면 슬퍼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럼에도 나는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는 안타까움때문에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자꾸 슬퍼지고 마는 것이다.

 



너 있으나 나 없고 너 없어 나도 없던

시작되지 않은 허구한 이야기들

허구에 찬 불구의 그 많은 엔딩들은

어느 생에서야 다 완성되는 걸까


<정끝별 _ 끝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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