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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22. 2022

꽃이 지는 순간

지난 봄의 기억

지난 봄, 때이른 더위를 식히는 비가 내렸던 어느날이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꽃이 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특히 벚꽃은 비가 몰고 온 바람에 날려 순식간에 떨어졌다. '아, 넌 아름답지만 참 약하구나. 이렇게 빨리 지다니. 그렇게 금세 질 거면 왜 피었니?' 탄식이 절로 났다.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떨어진 벚꽃은 바람에 흩날리며 유유히 쓸려가고 있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라는 최영미 시인의 시구절처럼 꽃이 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꽃은 가지에 달려 있을 때만 꽃이지,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꽃으로서 생명은 상실된다. 마치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만 인간이듯이. 땅바닥에 수북이 쌓인 벚꽃을 보면서 문득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순간만 피어서 아름다운 거고, 그 순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허무한 것이니 아름다움과 허무함은 뭔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슬픈 까닭은 이미 아름다움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몰랐다면 허무하지도 않았을텐데.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죽기로 결심하고 그의 옛 친구 구메 마사오에게 보낸 서간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살기 위해 살아 있는 우리 인간의 애처로움을 절절히 느꼈네. (...) 다만 자연은 이런 나에게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답네. 자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면서도 죽으려고 하는 나의 모순을 보고 웃을 테지. 하지만 자연이 아름다운 건 나의 마지막 눈에 비치기 때문이네.'


류노스케 역시 죽음을 앞두고 잠시 나마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멈칫했으리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죽는 순간까지 간직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 이 순간 느껴졌다. 어쩌면 그도 나처럼 벚꽃이 지는 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벚꽃이 아름다운 건 마지막 순간이 나의 눈에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꽃이 비바람에 무력하게 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많은 사건과 사고 앞에서 무력하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 나면 그동안 나를 지탱해왔던 힘이 서서히 빠지면서 자신감은 사라지고, 삶이 주는 충격 앞에 무덤덤해지기까지 한다. 그렇게 한 세월을 보내고, 그 세월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나면 허무해지고 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일찍이 알았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시편(90편)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을 세는 법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지혜는 때가 되면 꽃이 진다는 것, 우리 역시 기한이 차면 꽃처럼 쓰러질 운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자랑도, 온갖 세상의 명예와 부도 부질없다. 우리 인생과 꽃이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나는 그때 피고 지는 꽃을 통해 인생의 아름다움과 허무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남은 삶을 무엇으로 채워야 이 허무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류노스케처럼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사라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허무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자칫 허무함에 빠져 매사에 냉소적이 되는 것이고, 삶을 방관하는 것이다. 순간밖에 살지 못한다고, 내년 봄에 벚꽃이 피지 않는 건 아니지 않은가. 


같은 꽃은 아니지만, 내년 봄에도 여전히 새로운 벚꽃이 필 것이다. 무엇보다 지는 벚꽃을 대신해 새잎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꽃은 자신이 왜 이렇게 빨리 사라져야 하는지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잠깐 피었다가 지더라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꽃처럼 생명이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피는 것, 피어 있는 동안 아름다운 향기와 자태를 곳곳에 전하는 것, 내가 쓰러져도 그 자리를 채우는 새잎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것, 지난 봄에 핀 벚꽃이 나에게 가르쳐준 교훈이었다. 

"성실함이 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직업/공동체가 아니라 ‘자아’이다.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경제적인 영역에서도 탁월성과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성실히 책을 읽고, 성실히 운동을 하고, 성실히 여행을 가고, 성실히 휴식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의 ‘깊이 생각함’이란,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라면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쉽게 느낄 공통성의 기초를, 생존의 흐름에 내몰리고 휩쓸릴 때에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보선 _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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