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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Nov 15. 2022

사철 내내 꽃을 피울 수 없다

마루야마 겐지 /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낙엽 위를 걷고 있으면 올 한 해 정원의 편력이 끝난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식물이 잘 해냈다. 기대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훌륭하게 핀 꽃도, 잎이 무성하게 자란 초목도, 그다지 성장하지 못한 초목도 대업을 이루려는 강한 의지를 내년 봄으로 넘기고 긴 겨울잠에 들어가려 한다. 


그들에게는 끝없이 반복되는 시련을 극복해 갈 생기와 풍요로운 미래가 있다. 비참한 처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한 노년에 접어드는 것은 나밖에 없다."




지난 주말,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의 글을 읽고, 단풍이 절정인 서촌을 걸었다. 길을 걷다 보니 밟히는 건 온통 낙엽, 특히 은행나무잎 천지였다. 계절의 순환을 알리는 듯 노랗게 물들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이 나름 운치가 있었다.


인간의 눈에는 보기 좋지만 잎들이나 나무 입장에선 어떨까.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수분 공급을 줄여가면서 잎을 떨구어 내는 자기희생의 결과물이 단풍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되는 것은 힘든 과정이다. 그들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반복된 과정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베어내야 하는 아픔도 기꺼이 감수한다.


반면 나는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끌어안으려고만 하고 버리지 않으니 쌓이는 건 불필요한 쓰레기뿐.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치워서 없앨 수라도 있지만 마음에 쌓인 불순물들은 쉽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생성과 소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우리의 노년이 나무보다 더 비참하다면 곤란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지금 이 순간, 단풍에 취한 감상으로도 충분하지만 마루야마 겐지의 말대로 현실과의 투쟁을 피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는 법. 찰나의 아름다움과 소멸의 과정에서 성장하고 싶다면 가지를 쳐내야 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단풍이 준 깨달음이었다.




"풀잎도 나뭇잎도 한계까지 짙푸르러지고 도톰해지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종국에는 행복의 부스러기마저 소멸시켜 버린 듯한 표정의 나를 향해 계몽적인 말을 던져 준다.


끝없는 변화가 당연한 이 세계에서 꽃의 계절만을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쾌락과 고통이 나뉘기 어려운 이 생애를 뚫고 나가야 하는 존재이므로 결코 한때의 더 나은 상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늘 현재 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신을 파악하고 그때그때 자신을 다스리자고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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