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이 주는 여유
커피는 천천히 마셔야 커피 본연의 맛과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렇게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각박한 삶에서 여유를 찾게 해 주기도 한다. 특히 화가 날 때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후후 불어가며 마시다 보면 어느덧 화가 풀리기도 한다.
뜨거워서 빨리 마실 수 없으니 그 시간만큼 나를 진정시킬 수 있고, 식혀가면서 마셔야 하니 화가 나서 급해진 호흡이 평상시 호흡으로 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 따뜻한 커피를 마셔야 한다. 화가 나는 건 순간이다. 그 순간만 넘기면 감정은 사그라드는데, 순간을 참지 못하는 조급함이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커피나 차는 화를 진정시키는 좋은 수단이 된다.
돌이켜보면, 대학에 다닐 무렵에서야 커피를 마셨던 것 같다. 그것도 지금과 같은 원두커피가 아닌 대학도서관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동전을 넣고 뽑아먹는 믹스커피였다. 그때만 해도 다방이 있었지 지금과 같이 스타벅스는 물론 카페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카페에 갈만한 돈도 없었고, 그곳은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가는 곳으로 생각해서 딱히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커피를 먹는 목적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부를 하기 위해, 나는 졸음을 쫓기 위한 각성 차원에서 마셨던 것 같다. 여유는커녕, 커피를 후루룩 숭늉 마시듯 목에 넘기기에 급급했다. 빨리 마시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 공부하기 바빴으니, 제대로 된 커피의 맛과 향을 누릴 수 없었던 거다. 왜 그렇게 여유가 없었는지, 타고난 성격 탓도 있는 것 같다. 그때 들었던 버릇이 지금도 여전한 것을 보면.
피곤한 오후, 언젠가 신문 광고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대체로 이런 취지였다. "진한 커피로도 마음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의 몸이 말을 걸고 있는 겁니다. 반복되는 하루와 지루해진 일상에 브레이크가 필요하다고 말이죠. 잊지 마세요. 인생은 결코 리필되지 않습니다."
커피도 마치 음료수 마시듯 어떤 목적을 위해 마시니 커피 본연의 맛과 향을 음미하지 못한다. 그 결과 삶의 여유까지 함께 잃어버리고 말았다. 광고 문구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잠깐이라도 브레이크를 걸고,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실 여유가 없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 지금 이 순간 마시는 커피를 다시는 마실 수 없을지 모른다. 커피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내리는 방식, 물의 온도, 원두의 종류 등에 따라 맛과 향이 모두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소중하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듯, 모든 사람이 매일매일 달라지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 만나는 그 사람은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일까. 이젠 시간적인 여유도 있는데도 여유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가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종종 끼니를 건너뛰고, 커피를 연료처럼 몸에 쏟아부으며 잠을 쫓고, 지옥 같은 스케줄에 맞춰 허겁지겁 뛰어다니는 사람을 보면 다가가 말하고 싶다. '밥은 먹고 다녀요? 오늘은 쉽지 않더라도 꼭 다섯 시간 이상 푹 자요. 가끔 눈을 감고 멍도 때려야 해요. 우리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해요.'라고"
<박산호,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