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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Dec 30. 2022

자신의 연약함을 감당할 수 없어서

필립 로스 / 에브리맨

"그의 어머니는 여든에 죽었고 아버지는 아흔에 죽었다. ‘저는 일흔 하나예요. 당신네 아들이 일흔 하나라구요.' '좋구나, 네가 살아 있구나.'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되돌아보고 네가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속죄하고 남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해 봐라.'


그는 떠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연약함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지금 살아있기를 바라는 갈망, 그래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갈망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에서 늙고 병들고 지친 주인공이 부모의 묘지를 찾아 죽은 부모와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삶은 갈망할 수 없는 것을 갈망하고, 감당할 수 없음에 끝없이 절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감당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감당할 수 없지만 감당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돈이 많든 적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많은 것을 알든 알지 못하든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삶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노력이 필요하고 인간답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시절이 화려했던(아니면 화려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던) 만큼 그렇지 못한 현재의 삶이 더 허망하게 다가온다. 화려함의 중심에 권력이 있었든, 부가 있었든, 남다른 명예가 있었든 욕망을 추구한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 허망함은 더 깊게 다가오는 법. 그때 그렇게도 손에 잡으려고 애썼던 것들이 결국 이런 것이었던가?


어쩌면 필립 로스는 짧은 인간의 삶을 통해 삶의 존재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유한한 삶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며 조그만 것에서부터 보람과 의미를 찾아가면 비록 육체는 쇠하나 정신은 더 찬란하게 빛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러면 죽을 때 덜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주인공처럼 그동안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남은 생을 비관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늙음과 죽음 그리고 삶의 허무함까지 포함해서 부족하기만 했던 '지난날의 나'를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생이 재미있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소중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욕망 뒤엔 허무함도 함께 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창문 너머로 나무의 잎들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10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의사가 찾아왔을 때 그는 말했다. '언제 퇴원하죠? 1967년 가을을 놓치고 있잖아요.' 의사는 침착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더니, 이윽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모든 걸 놓칠 뻔했는데...'"


"다이아몬드란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와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이거든.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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