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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y 20. 2023

지난 시절의 기억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권여선 / 기억의 왈츠

어떤 기억은 뒤늦게 떠올라 삶의 진실에 대해, 무엇보다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과거의 기억을 살려내 현재에서 그 기억을 돌아보는 어느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권여선 작가의 <기억의 왈츠>가 그 소설입니다.


주인공이 대학원에 다닐 때 만났던 남자(경서). 그는 주인공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별 관심이 없어서인지 때를 놓치고 맙니다. 그가 보낸 편지는 다른 짐들과 섞여 개봉되지 않은 채 세월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지금 와서 읽어본들 늦은 일입니다. 이젠 그와 함께 했던 기억마저도 희미해졌습니다.


"나는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청춘의 한 시절을 자꾸 되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무려 삼십 년도 넘은, 거의 사십여 년이 되어가는 머나먼 과거의 일들이다. 반복해서 돌이키다 보니 처음에는 안개가 덮인 듯 아득했던 기억이 조금 또렷해지는 듯했고 점점이 끊겼던 사건의 순서가 느슨하게 연결되기도 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어떤 계기가 없는 한, 지난 시절의 일을 일부러 떠올리진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를 기억한들 달라질 게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지난 시절의 나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어리석은 짓만 했기 때문일까요?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곧 자신을 돌아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괴로운 일입니다. 안 좋았던 기억과 후회스러웠던 일들이 주로 기억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한없이 부족했고, 어리석었던 그 시절의 나,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타인처럼,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바라볼 수만은 없는 것을요.


"그러나 과거를 반추하면 할수록 내게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시절의 내가 도무지 내가 아닌 듯 무섭고 가엾고 낯설게 여겨진다는 사실이었다.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지 모른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주인공은 기회가 있었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 기회를 기회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하겠네요. 삶은 정교한 흐름입니다. 흐름을 놓치면 방향이 어긋나 버립니다. 다시는 돌아가서 그 흐름을 탈 수 없습니다. 그저 안타까운 심정으로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의 눈빛, 그의 경청에서 그가 나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해석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서서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한편으로는 혹시 그가 내 내부에서 치명적인 진실들을 캐낼까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내게서 아무것도 캐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 둘은 아마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웠던 건 내가 그를, 경서라는 인간을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었다."


그 시절의 그녀는 자기 방어적이었습니다. 자신을 지키려고,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그의 사랑을 외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던가요? '그가 나의 이런 점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알면 나를 떠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이 사랑의 감정을 위축시키고 급기야 사랑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 당시 내게 경서를 향한 특별한 감정과 욕망이 결여되어 있었던 건 맞다. 어쩔 수 없다. 문제는 내가 지키는 줄도 모르고 지키려 했던 무내용이다. 아무것도 없는 개미굴 같은 폐광을 절대 굴착당하지 않으려고 철통같이 지켜내려 했던 그때의 내 헛된 결사성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끔찍한 모순이며 기망인가. 나는 경서에게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그녀는 그 시절에 우연히 만났던 어느 늙은 여인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불쌍한 강아지들을 혹독하게 다루던 여인, 그 여인 또한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삶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그 여인을 통해 자신의 지금 모습을 봅니다. 그녀도 그 여인의 나이에 다다른 지금, 뭐가 다를까요? 그 시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어느덧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너무 늦었을까요?


나를 사랑하는 상대에게 가장 못할 짓은 그만 만나자는 말이거나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나의 '무관심'입니다. 무관심만큼 무서운 복수도 없습니다. 그를 내 삶에서 지우는 것입니다. 그가 있었던 상태에서 없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아마 주인공을 사랑했던 경서도 그녀의 무관심에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그는 그녀와 잘해보려고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보내온 편지에는 만나자는 말도 있었지만, 그녀가 그 편지를 열어본 것은 그로부터 4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 까맣게 잊고 마는 그 잔혹한 무심함은.' 어쩌면 강아지들을 혹독하게 다룬 늙은 여인은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지난 시절에 대한 기억이 암울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어두웠던 기억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오히려 그 기억으로 인해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거라고 다짐하니까요. 이제는 회피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그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자신을 만나야 비로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픈 과거의 기억은 때로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합니다.


"아직 희망은 있다.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기억은 또 다른 차원의 기억을 되살려냅니다. 그 기억은 젊은 날 위축되었던 그녀에게 경서가 했을지도 모를 위로의 말입니다. '나를 알아본 사람을, 내게 그러지 마, 그러지 마, 하던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기억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어쩌면 그녀는 지난 시절의 기억에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용기를 얻으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요? 지난 시절의 어두웠던 기억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작가의 이 말처럼요.


"나는 언제나 지나간 것들에 대해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편이지만 끝내는 주먹 쥔 손을 풀고 웃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거미줄처럼 희미하더라도 마지막은 웃음이었으면 좋겠다고."

Christian Ang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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