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비 오는 밤, 잠이 오지 않아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펼쳤다. 그전에는 그냥 스치듯 지나쳤던 문장이 눈에 띄었다.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에 나오는 글(등나무엔 벌써 초승달 올라와)이다.
"도서관 유리문을 열고 나오던 어느 저녁이었다.
5월의 푸른 밤이 교정 위로 드리워졌다.
도시의 붉은 불빛에 검게 기대선 저녁 산 이마 위로
별빛이 반짝였다."
왜 이 글이 눈에 띄었을까. 청춘이 지나가버린 것을 중국 한시에 빗대 쓴 글이어서, 아니면 문장이 아름다워서, 아마 둘 다일 수 있지만 눈길을 다시 끌었던 정확한 이유는 문장이 주는 힘 때문이었다. 지난 시절, 어느 한때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문장치고는 꽤 근사했기 때문이다.
오래전 사법시험 준비를 하면서 대학 도서관 유리문을 열고 나오던 어느 밤이 떠올랐다. 그때도 푸른 밤이 교정 위를 드리웠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의 잔상과 함께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때는 그때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지금에 와서야 지나가버린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리움만 쌓아가다가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는 것이 우리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역시 미래의 어느 날, 그리워할 날일지도, 그렇다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고 지금을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건 내가 경험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뭔가에 빠진다면 그건 내 안에 들어온 그 뭔가에 빠진다는 뜻이었다. 사랑도 증오도 행복도 슬픔도 모두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히는 물방울 같은 것이었다."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히는 물방울 같은 것이라니, 참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쉽게 마르지도 않고, 없앨 수도 없었던 것은 내 세계 안쪽, 내 마음에 맺혔기 때문이다. 사랑이 귀한 것은 뭔가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좀처럼 드문, 나한테 숭고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가끔은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밤은 깊어가는데,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정적을 깨뜨리고,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7월의 어느 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