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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10. 2023

사랑해서 그리웠고 닿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던

이청준 ㅡ 젊은 날의 이별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게 됐는데, 그 사람이 애초부터 나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포기하고 말아야 할까 아니면 끝날 때 끝나더라도 한 번 시도는 해봐야 할까. 내가 그 입장이 된다면 후자를 선택하겠지만, 막상 현실에서 이 문제와 부딪힌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청준 작가의 소설 <젊은 날의 이별>이 그 이야기이다. 1971년에 나온 소설, 휴대전화는 당연히 없었고, 편지와 공중전화, 집 전화로 의사소통을 하던 시절의 일이니 아주 오래된 소설이다. 세월이 흘렀다고 사람이 주고받는 감정까지 지금과 다른 건 아니다. 사랑과 이별은 인간 역사의 공통된 주제이기 때문이다.

풋풋한 여고생이 주인공. 이름도 그 시절에 흔한 '미영', 시골에 사는 이종사촌인 지훈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미영의 집에 살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인척 관계로 맺어진 사이니 애초부터 두 사람은 남녀 관계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미묘한 신경전 끝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벽. 지훈은 미영을 떠남으로써 고독 속에서 그 한계를 받아들였고, 미영 또한 조금씩 지훈에 대한 그리움과 열정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핵심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선(感情線)의 변화였지만 그 감정을 '편지'를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지훈은 미영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늘 미영의 상념으로 머리가 가득해져 있곤 했어. 미영에게 글을 쓰고 싶어 졌지. 마치 나는 미영에게 멋진 편지를 써 보내기 위해 일부러 이번 여행을 떠나온 것처럼 말이야.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미영의 곁에서는 나의 기분대로 될 수가 없었고, 오히려 늘 그 반대의 얼굴만 하고 있는 바보였거든.


한데 이렇게 미영을 멀리 떠나와 있으니 나도 이제 조금쯤은 용감해질 수가 있는 것 같았단 말이야. 게다가 곁에 있는 것은 언제나 잊어버리기 쉽고, 멀리 있는 것은 거꾸로 그립기만 하는 것이 인간사 아니겠어."




부재를 통해 그녀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게 된 지훈, 어쩌면 우리는 그 긴긴 부재의 시간을 견디면서 나만의 사랑을 완성해 가는지도 모르겠다. 부재의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통과해야 할 시간이었다.


부재가 사랑의 완성에 필요한 것처럼, 침묵 역시 사랑에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다. 말하고 싶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훈은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미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말하지 않아도 우린 다 알고 있잖아. 그것이면 그만이야. 그리고 우린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말해버리지 않고 견뎌냄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는 거야. 우린 이제 훨씬 더 착하고 아름다워져야 할 차례가 아니야? 미영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간도 있다. 아니, 말은 부질없어 보인다. 그들 사이에선 말로 담을 수 없는 감정이 있었고, 이제 그 감정을 추스르는 것도 언어가 배제된 어떤 상태이어야만 했다. 그렇게 둘은 묵묵히 침묵 속에서 서로를 향한 감정을 견뎌야 했던 거였다.




두 사람 모두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지만, 서로에 대한 애틋함 때문에 성숙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실현되지 않은 사랑과 이별의 고통은 우리를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시킨다.


"사람은 늘 멀리 있는 것이 그리워지고, 한번 그립기 시작한 것은 참으려고 할수록 그 참음을 먹고 그리움은 자꾸만 더 커져버리는 것인가 봐요. 그러고 나면 그 그리움은 안타깝도록 제게 말을 시키고 싶어 하지요."


"저도 오빠처럼 말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배웠고 또 그것을 어떻게 견뎌내서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를 보았으니까요. 처음에는 껍질을 벗는 듯한 아픔이 굉장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진짜로 껍질을 벗어버린 거예요."


두 사람이 밀고 당기는 소위 ‘밀당’의 실랑이를 보면서, 상대에게 보낸 애절한 편지를 읽으면서 웃음도 나오고 한편으로 아쉽기도 했다. 사랑해서 그리웠고 그러나 닿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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