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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an 22. 2024

상처 입은 치유자

<스탕달 ㅡ 파르마 수도원>

스탕달의 <파르마 수도원>을 읽은 지도 몇 년 전이니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겨울이라서 이 책이 생각났을까. 맞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추웠던 것으로 기억되는 추운 어느 겨울날.


실제로도 추웠지만 내 상황 때문에 더 춥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외부환경은 마음의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여유가 있었거나 주변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었다면 추워도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을 거다.


언젠가 영화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집에 가족들이 식탁에 모여 앉아 정다운 얘기를 하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까지 흐르는 흔한 크리스마스 풍경, 장면 자체로도 따뜻함이 전해지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 평범한 장면이 인상 깊었던 건 다른 이유였다. 그 집안을 밖에서 물끄러미 훔쳐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따뜻함이 그리워 성냥불에 의지해서 남의 집안을 훔쳐보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그도 그 집안사람들처럼 자신의 가족과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었으리라. 부러워하면서도 쓸쓸했던 그의 시선,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환경과 상황은 내가 처한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채색된다.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면 세상도 그렇게 다가오고, 반대의 경우에는 아무리 세상이 아름다워도 그 이면에 있는 불편함을 끄집어내 흠집을 내려고 한다. 각박해지는 것이다.   


상황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도 아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도 분명히 있다.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집안을 훔쳐보며 대리만족을 하거나 자괴감을 느낄 수는 없지 않은가.




스탕달의 이 책은 그의 말년에 구술로 쓰인 소설이다. 그의 대표작 <적과 흑>과 달리 문장의 정합성이나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스탕달의 소설이 아니던가. 그런 점을 감안해서 이 책을 읽었다.


"그 눈빛! 그 눈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던가! 참으로 깊은 동정심이었어. 그 소녀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이 보였지. '삶이란 이처럼 불행을 날실 삼아 짠 베와 같군요. 당신께 닥쳐온 일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불행을 짊어진 채 살아가지 않나요?'라고."


곤경에 처한 주인공 파브리스는 자신을 지켜보는 소녀의 눈빛에서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의 따뜻한 심정을 느꼈다.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아픔과 고통. 동정을 넘어 깊은 연민의 정이었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어려움을 겪고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 행복한 순간이 있으면 불행한 시절도 있다. 나는 왜 인생이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은지 알지 못한다.


다만 행복한 시간이 주어지면 그 순간을 누리되, 그때도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겸손해야 한다. 한편 불행한 시기에는 언젠가 나에게도 행복한 시간이 찾아오리라고 믿고 인내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보다 더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소설 속 소녀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 주면 좋을 것 같다. 당신에게 닥쳐온 일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고. 당신이나 나나 우리들 모두는 이 세상에서 불행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고통의 깊은 연대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라는 고난과 상처를 통해 우리의 치유자, 구원자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처럼 자신의 겪은 어려움을 통해 누군가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겪고 있거나 겪었다면, 서로에게 치유자가 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가톨릭 사제이자 영성가인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이 말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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