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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y 09. 2024

이야기의 힘 사랑의 힘

여기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다. 힘겨운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그들은 자리에 누워 창가에 비치는 자동차 불빛이 만들어낸 무늬를 보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 단순히 그날 있었던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닌 삶의 결핍에서 단서를 얻은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여인이 냉장고에 보관한 마른 멸치가 떨어져 국수를 만들 수 없게 되자 멸치를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듣고 있던 남자가 이어받는 형식으로 다소 긴 약간은 황당한 스토리를 완성한다. 잠이 오지 않는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자기 전까지 끝없이 이어진다. 박형 서 작가의 단편 <자정의 픽션>에 나오는 두 연인이 그 주인공이다.




그리고 우리는 창밖에서 흘러들어와 천장에 희미한 무늬로 남은 가로등 빛을 나란히 바라보았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거기에 새로운 무늬가 덧새겨졌다. 밤이면 보게 되는 마지막 이미지, 예쁘지도 않고 별다를 것도 없는 가난한 흑백 무늬였다. 남루한 이 하루의 끝엔 또 하나의 남루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겠지. 게으르게 드러누워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겠지.


그녀가 생긴 이후, 내가 무얼 줄 수 있는 사람인지 때때로 가늠해 보는 습관이 들었다. 이처럼 궁상맞은 신세라면 저 물결치는 흑백의 남루함마저 언젠간 나를 떠날 게 아닌가. (...)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든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겹쳐진 듯이 보였는데, 그건 아마도 폭신하게 내려앉은 어둠 탓이리라. 공평한 밤의 무게를 나눔으로써 우리 고단한 하루는 이제 막 자정의 기슭에 가닿았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정적, 그 평화로운 조합이 만들어낸 안식 속으로 나란히 헤엄칠 일만 남았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함께 있으면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끝없이 이야기한다. 만나서 다 못하면, 집에 가서도 자기 전까지 무슨 말이든 한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짜임새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지는 그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끊임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면 건강한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이야기가 끊기면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커녕 간단한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곧 헤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인 것이다.  


오늘 인용한 부분은 두 사람이 고단했던 하루를 마치고 막 이야기를 끝내고 잠을 청하는 장면이다. 애처로우면서도 뭔가 가슴이 찡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문장이다. 사는 게 고단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힘이 난다. 그 순간 무엇이 더 필요할까. 사랑은 남루한 현실을 이겨내고 흑백으로 가득 찬 세상에 다채로운 색깔을 입히는 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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