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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수 Oct 08. 2023

한글날, 우리말글을 지키자 (1)

다시 한글날이다. 1년 전(2022년 10월 9일)에 내가 쓴 브런치글을 읽다 보니, 씁쓸하다. 1년 동안 우리 사정은 오히려 나빠졌다.


바로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모 씨 이야기다. 그가 4월에 미국을 국빈방문한다며, 미국 의회에 가서 영어로 연설하고, 파티에서 영어노래를 부르고 했던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한국어와 한글을 뽐내고, 외국인들이 한류의 열풍 속에 우리말글을 배우는데, 영어 사대주의에 빠져, 우리의 어문(語文) 정책, 말글정책은 오히려 역행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그는 6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있은 <부산 엑스포>를 위한 PT에서 한국어도 프랑스어(프랑스어 전용정책을 쓰는 나라에 가서)아닌 영어를 사용했다. 그 회의에 지각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던데---      


이번에 이 정부 들어 18번째로 국회의 동의 없이 국방부장관을 임명하고, 국회 인사청문회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문체부장관에 예전에 장관이던 인사를 임명했다는데, 재(再) 문체부장관이 한글날에 어떤 태도를 보이나 지켜보려 한다.     


* 2020년 발간한 『푸른 나라 공화국』 (바른북스) 165~184쪽을 조금 고쳐 실었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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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가갸날     


우리는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하여 국경일(공휴일)로 기념한다. 자기 문자를 만든 날을 이렇게 기념하는 나라가 또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때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져 있던 시기가 있었다. 1990년에서 2005년까지다. 그때는 공휴일을 줄여서라도 일을 더 해야 한다며 국경일을 줄였고,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졌다. 그러다가 2005년 정기국회에서 한글날을 다시 국경일(공휴일)로 지정하였다.     


남북언어 통합을 위한 국제학술회의가 있었다고 한다. 북한은 오랫동안 한글(그들은 ‘조선어’라고 부른다)을 전용하면서(1968년부터 중학부터 한자(漢字) 교육을 한다), 새로운 말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남북통일 과제에는 남북언어의 이질성을 해소하는 언어통합문제도 있다.     


프랑스는 1992년 제5공화국 헌법 제2조에 ‘공화국의 언어는 프랑스어다’라고 정해 놓았다. 캐나다에서 다른 주는 모두 영어가 공용어인데, 퀘벡주는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하는 독자적 언어정책을 채택한다. 요즈음 K-팝 등에서 한국어와 한글자막이 자주 사용된다. 얼마 전에는 CNN 광고에서 한국 소방관이 우리말을 하고, 영어 자막이 붙어 있는 광고가 있었다.     


IT시대에 한글이 효율적이고 적합한 문자이고, 문자로서의 과학성과 체계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한류에 힘입어 한국의 노래, 영화, 드라마, 문학작품, 전통문화를 알고 싶어 우리말글을 배우려는 외국인이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내부에서는 이런 우리말글이 제대로 인정받고 있나? 오히려 조선시대의 언문(諺文)처럼 ‘천한 말’ 취급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관련된 책을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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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끼의한글의 탄생     


일본인 이로노마 히데끼가 『한글의 탄생』(돌베개, 2011)이라는 책을 썼다. 책머리에 ‘한글의 탄생-그것은 문자의 탄생이자 지(知)를 구성하는 원자(原子)의 탄생이고 <쓰는 것>과 <쓰여진 것>, 즉 <에크리튀르>의 혁명이다. 새로운 미를 만들어내는 <게슈탈트Gestalt=형태>의 혁명이다. 이 책이 그러한 거대한 탄생의 드라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데 작은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세종은 단순히 현명한 군주가 아니라 극한까지 배우려 했던 거대한 지성이다. 기원전 2000년께 지금의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시작된 표음문자, 알파벳 로드가 한국에 이르러 확고한 종언을 선언했다. 조선왕조의 문자가 유라시아의 정상에 우뚝 섰다. 마치 논리를 형태화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지극히 논리적인 구조이면서도 유연한 쓰임을 가능케 한 점이다. 글자 모양의 형성도 그렇고, 음성을 초성·중성·종성 그리고 성조라는 사분법으로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구조화하면서도 실제 쓰임에서는 가로쓰기와 세로쓰기가 가능하다.”고 썼다.     


히데끼는 미술가였다. 어쩌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읽는 순간 마치 공기진동에 불과했던 소리가 문자로 바뀌는 순간을 엿보는 감동을 느꼈고, 한글의 형태적 측면에 매력을 느껴 언어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정작 나는 관심도 지식도 부족한 게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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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전쟁, 언어의 종말     


김흥식은 ‘우리말 우리글 5천년 쟁투사’라는 부제가 붙은 『한글전쟁』 (서해문집, 2014)의 첫머리에 ‘오늘도 대한민국에서는 한글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냉전(冷戰), 즉 저 밑바닥에서 적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며 싸우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열띤 전투가 벌어지는 열전(熱戰) 중’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한글전쟁은 수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벌어진, 무력을 동원한 무수한 전쟁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전쟁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전쟁이 한반도를 덮쳐 수많은 선조의 인명과 수많은 문화유산이 사라졌지만 한겨레의 문화와 언어는 무수한 상처를 입으면서도 여전히 건재하다.      


한글전쟁은 그 본질이 문자(文字) 전쟁이고, 문화(文化) 전쟁이며, 우리를 우리로 인식하게 하는 본질, 즉 언어와 문화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전쟁의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고 있다.”고 썼다.  

   

앤드류 달비는 『언어의 종말』(오영나 옮김, 작가정신, 2008)에서 ‘2주에 한 개꼴로 지역 고유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2만여 년 전부터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쓰이던 4백여 개의 언어는 유럽인의 침략 후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멸했으며, 살아남은 언어들도 그 사용자 수가 급감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쓰이고 있는 5천 개가량의 언어 중 과반수가 이번 세기 동안에 사라질 것이다.      


언어적 다양성 소멸은 결국 각각의 고유한 문화, 세계관, 언어의 창의성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다양한 언어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방안을 시급히 찾아야 하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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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글의 운명     


그렇다면 한국어나 한글은 어떻게 될까? 한때 영어공용화 논쟁이 있었다. 지금의 국내 언어사용 실상을 보면 앞으로 우리말글이 영어 등 외국어에 경쟁력이 밀려 제2의 언어가 되거나 소수언어가 되는 형태로 생존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정녕 남의 일이 아니다.     


북한은 1947년 북한정권 수립 이래 한글(북한은 ‘조선어’라고 한다) 전용정책을 고수해 왔다. 여기에는 언어를 혁명과 건설의 힘 있는 무기라고 보는 유물론적 언어관에 입각한 북한 언어 정책, 이른바 김일성 주체 사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언어를 개조하는 정책의 추진과 폐쇄적 공산주의 체제에서의 생활, 당의 통제 하에 철자법 개혁, 한자 폐지, 말다듬기 운동, 문화어 운동 등을 강력하게 펼쳤다.     


베트남과 몽골을 보자. 그들은 로마자와 러시아글자로 자기네 말을 표기한다. 이것이 그들의 전통과 문화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지켜볼 일이지만, 원래 하와이 왕국(지금은 미국 50개 주의 하나다)이 미국에 병합되면서 영어와 함께 하와이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의무교육이 모두 영어로 진행되면서 하와이어 사용도가 떨어졌다가 일부 주민들의 노력으로 겨우겨우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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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우리글     


『나라말이 사라진 날』(정세환 지음, 생각정원, 2020)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에 우리말글을 사명으로 다듬고, 피땀으로 지킨 사람들, ‘조선어학회사건’에 대한 글이다. 이미 역사에서 배웠고, 「말모이」라는 영화를 보아 대강을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 소개된 생생한 이야기가 눈시울을 적셨다. 책을 쓴 방송작가는 30대 중반부터 우리말글 사랑운동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나는 60살이 다 되어서부턴데.     


국어라는 명칭은 좀 이상하다. 나는 이것저것 외국어 배우기를 해왔다. 어떤 언어에도 능숙하지 못하지만, 영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조금은 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는 자기 언어를 우리처럼 국어(國語), ‘나라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언어를 각각 영어(english), 中國語(chinese), 독일어(deutsch), 프랑스어(français)라고 부른다.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1446년 훈민정음으로 반포된 우리글(한글)은 언문(諺文), 정음, 반절, 가갸글 등으로 불리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국문’이라 명명되었다. 그런데 국문(國文)이란 ‘자기 나라에서 쓰는 고유한 글자’라는 뜻이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다. 그동안 한글이란 말이 어디서 시작되었나 궁금했는데, 주시경이 ‘한글’이란 말을 처음 썼다고 한다.     


『나라말이 사라진 날』 55쪽에 한글의 유래가 설명되어 있다.     


‘1913년 3월 13일 배달말글몯음 임시총회 기록에 ‘한글’이 등장한다. 이날 회원들은 보성중학교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모임의 이름 ‘배달말글몯음’을 ‘한글모’로 바꾸었는데, ‘배달말글’을 ‘한글’로 줄이고 ‘몯음’을 ‘모’로 줄였다. ‘배달말글’을 갈음한 ‘한글’을 우리 문자를 이르는 명칭으로 사용하겠다는 선언은 없었지만 ‘한글’은 훈민정음, 정음, 언문, 특히 조선글이라는 시대의 변화에 걸맞지 않은 어중간한 이름을 대체할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훗날 최현배는 주시경이 한글이란 이름을 지었으며, 한글은 ‘하나, 크다, 바르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다른 나라가 제각기 영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라 부르는데, 왜 우리는 국어라고 하면서, ‘한국어’나 ‘한글’ 등 명칭을 붙이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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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글이 없다면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우리말글(당시에는 ‘조선어’라고 했다. 국어는 일본어였다.)을 쓰지 못하게 했다. 1945년 광복 이후 한참 동안 한글전용과 국한문혼용 사이의 논쟁도 있었다. 전에는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세계화 시대에 국제경쟁력을 높이려면 영어를 써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말글이 오늘에 오기까지 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공용어가 무어지? 물으면 당연히 ‘한국어’나 한글’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좀 생각해 보면 왜 ‘국어’라고 하느냐이다. 나는 여기서 일단 ‘우리말글’로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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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

(『나라말이 사라진 날』 4쪽)     


‘이제 고오고쿠 신민노 세이시를 읊겠습니다. 모두 힘차게 암송하도록!’

(『내 이름은 이 강산』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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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정말이지 ‘리노이에 코우잔’보다,

‘이강산’이 백배 천배는 좋았다.

(위 책 100쪽)     


앞의 글은 『나라말이 사라진 날』을 시작하는 문장이다. 국어를 썼다가 혼났다고? 어떤 여학생이 자기 일기에 쓴 글이다. 여기서 국어는 조선어다.     


뒤의 글은 『내 이름은 이 강산』 (신현수 글, 이준선 그림, 꿈초, 2018)의 처음과 마지막 문장인데, 일제의 창씨개명에 얽힌 이야기다.     


만약 고유어가 없다면, 겨레의 문화와 전통이 없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조선어학회가 여러 해(약 20년) 작업으로「말모이」라는 우리말 사전을 만들지 않았다면, 일제 35년이 지나고, 창씨개명으로 서로 부르는 이름마저 일본말로 바뀌었으니, 나중에 해방이 되더라도, 우리말 단어나 어휘가 없어 지금도 일본어를 쓰고 있을 수도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럽국가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고 나서도 여전히 자기를 지배한 식민 모국의 말을 쓰듯이 말이다.     


1987년에 복거일은 『비명(碑銘)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은 우리가 광복도 되지 않았고, 철저히 일본인이 되어 살고 있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중국을 지배했던 청나라가 자신들 고유어인 만주어를 잃어버려 중국인으로 동화되어 버렸다. 우리가 만약 한국어와 한글이라는 고유말글이 없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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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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