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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 록키를 걷다.

말린 계곡을 걷고, 말린 호수를 걷다.

by 정윤식

이번에 캐나다 록키에 오면서 하고 싶은 게 몇 가지가 있었다. 캠핑, 트래킹, 알버타 소고기.. 대충 이렇게 마음을 먹고 왔다. 캐나다의 여름은 정말 길었다. 아침 5시 넘어서 해가 떠올랐다. 위도도 높고, 지대가 높아서 한 밤에 온도가 8도까지 내렸갔다. 한 낮 최고기온이 31~32도에 이르니, 일교차가 20도가 넘었다. 록키에서의 캠핑을 쉽게 봐서, 어제 밤에 쌀쌀한 찬 공기 때문에 잠을 설쳤다.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마음에 두었던 트래킹 코스로 향했다. 재스퍼에는 말린 캐년(Maligne Canyon) 주변의 트래킹 코스가 유명하다고 한다.


캠핑장에서 30~40분 정도 차로 이동하여 다섯번째 다리(Fifth Bridge) 인근 주차장에 도착했다. 말린 캐년은 상류에서 하류까지 총 6개의 다리가 있는데, 위에서부터 1,2,3,4,5,6번째 다리로 이름을 붙였다. 한자로 하면 일교, 이교, 삼교, 사교, 오교, 육교 이렇게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5번째 다리부터 1번째 다리까지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니, 아이들을 데리고 적당히 트래킹하기 좋은 코스였다. 5번째 다리를 건너자 빙하가 녹은 물들이 거센 물살을 이루며 떠내려오고 있었다. 강 사이의 비탈사이로 2~3명이 지나갈 수 있는 트래킹 코스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록키에는 이와 같이 트래킹 코스가 무수히 많다. 마음만 먹으면 1주일, 한 달동안 트래킹을 해도 끝이 없을 정도이야. 캐나다 트래킹은 산 정상을 올라가는 코스라기 보다는 산 능성과 비탈길을 따라서 걸어갈 수 있는 코스인 듯 했다. 하류에서 상류로 이어갈 수록 강폭은 점점 좁아지고, 물살은 점점 거세졌다.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이, 거센 물살에 부딪혀 물보라와 함께 부서지며 눈을 부시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그 트래킹 길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부서지는 햇살에, 저벅저벅 걸어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물소리, 바람소리, 따스한 햇살 그리고 폐 허파꽈리 하나하나에 알알이 박혀드는 신선한 산소가 느껴지는 듯 했다.


한국에서 느낄 수 있는 여행을 캐나다 록키까지 와서 느낀다고 하니, 한심하기도 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장소, 시간을 왜 거기서 찾지 못하고, 10시간을 날아와서 느끼게 되었을까? 행복은 거기에도 있는데, 왜 여기서 행복을 느껴야 하는 걸까? 하며, 록키를 걷고 있었다. 또 다시 초딩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오빠? 여기가 어디게?” “여기 말린 계곡이지.. 안 말린 계곡이 아니고, 햇빛에 말린 계곡이지..ㅋㅋ” 생각해보니, 나도 초딩 때 이름 가지고 깨나 장난치곤 했다. 이름이 식으로 끝나면 식빵, 호로 끝나면 호빵.. 이라고 불렀다. 그게 뭐가 웃기다고 친구들끼리 놀리고 다녔는데,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초딩은 비슷하게 노는 것 같다.


말린 계곡은 3번째 다리부터 풍경이 달라졌다. 다리 아래로 수십 미터에 이르는 낭떠러지가 있었다. 심장이 쫄깃쫄깃해질 정도의 높이 아래에는 굉음을 내며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렇게 쏟아지는 물이 계곡을 깎고, 모이고 모여서 대서양으로, 오대호로, 북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말린 계곡은 빙하가 마르는 그 날까지 마르지 않고 계속 물을 쏟아낼 듯하다. 2시간 넘게 말린 계곡을 하류에서 상류로, 상류에서 다시 하류로 걸어내려오니 허기가 졌다. 아침에 싸온 도시락을 챙겨먹고, 잠시 숙소로 돌아와서 쉬었다. 여긴 어딜 가나 물소리가 가득하다. 내 평생 그렇게 많은 물소리를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린 호수로 향했다. 스피릿 아일랜드(Sprit Island)로 유명하다는 말린 호수로 향했는데, 록키 주변에서 가장 큰 호수라고 한다. 말린 호수 인근 주차장으로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주변을 잠시 걸었다. 선착장 근처에 꽤나 큰 잔디밭이 있었다. 오전에 트래킹에 지쳤는지, 아이들은 말린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고 싶다고 했다. 초3, 초1은 전세계 어딜 가나 모래파기, 물장난이 좋은 모양이다. 미리 입혀놓은 수영복 차림으로 차가운 말린 호수에 풍덩 뛰어든다. 둘이서 어부바 하고, 물장난 하고, 모래파기하고 놀기 시작했다. 그 큰 호수에서 물에 들어가 노는 사람은 저 멀리 한국에서 온 초3, 초1 밖에 없었다. 저 멋진 설경과 호수 수면에 비친 구름과 산들을 배경으로 아이들은 웃으며, 2시간을 훌쩍 넘어 놀았다.


그 덕택에 아내와 나도 잔디밭에 앉아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망중한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너무 뛰어다는 것 같았다. 밥도 후다닥 먹었고, 차도 속도를 내며 몰았고, 시간에 쫓기는 듯 살았다. 하지만 여기에 와서 시간변경선도 건너 보고, 쫓겨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기분을 누렸다. 시간을 정해 놓고 놀지 않아도, 시간을 정해 놓고 걷지 않아도, 시간을 정해 놓지 않고 밥도 먹을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쏟아졌다. 오늘은 록키를 걸었다. 말린 계곡을 걷고, 말린 호수를 걸었다. 내 마음의 상념들을 따사로운 햇빛에 말리며, 나를 생각하고 시간을 생각했다. 이 멀리 이국땅에서 느낀 햇볕, 물소리 그리고 시간을 생각하며, 돌아가는 한국에서도 그렇게 살아가기로 다짐을 해본다.


오늘은 내 생각을 따사로운 햇빛에 말려 소독을 하고, 말린 계곡과 말린 호수를 걷고 걸었다.


P.S 말린 호수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들이 길에 서 있길래, 나도 덩달아 섰는데, 주변에 곰이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캐나다에서는 도로 중간중간에 차들이 멈춰서서 야생동물을 즐겨보곤 한다. 가는 길을 멈추고, 차를 멈추고, 때론 야생동물을 지켜보는 삶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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