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빠를 기억하고 회복하는 방법
2022년 음력 4월 초하루, 아빠의 첫 제사가 돌아왔다.
덥지 않고 미세먼지도 없는 청량한 토요일이었다. 주말이라 나도 엄마를 도와 음식을 할 수 있었고, 경상북도 멀리 사는 친척들이 서울로 오기에도 수월한 날이었다. 아빠는 삼형제 중 맏이다. 두 삼촌들 가족의 방문에 11명의 인원이 집에 꽉 찼다. 집엔 무거운 공기 대신 잔칫날같은 경쾌함이 흘렀다.
멀리 사는 이모들, 이종사촌들까지 오겠다고 했지만 집이 좁아 더 올 수 없었다. 며칠 후 납골당만 같이 가기로 했다.
아빠의 첫 제사는 시끌벅적, 우당탕탕 그 자체였다. 다들 제사가 낯설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댁은 큰집이 아니어서 작년 추석 때도 우리집에서 처음 해보느라 다들 애먹었는데 제사도 쉽지 않았다. 아빠를 매개로 모인 우리들, 근데 아빠는 아마 이 우당탕탕 분위기를 좋아했을 거 같다.
나는 축문을 세번이나 써야 했다. 축문은 조상에게 축원을 올리는 글..?같은 거다. 날짜를 틀리게 쓰고, 한자도 틀리고 아주 난리였다.
삼촌들은 한시간이나 인터넷을 뒤지며 축문 바르게 쓰는 법을 찾아야 했다. 동생은 아빠를 부르는 문구를 써야 하는데 인터넷 글귀를 베끼다 '조부(할아버지)'라고 썼다. 유쾌한 큰 숙모가 "아버님이 '닌가, 낸가?(경상도 사투리로)' 누구 부르는 건지 헷갈려서 못오시겠다"고 연기 톤으로 말씀하셔서 모두 웃어버렸다.
열심히 쓴 축문은 제사 순서를 몰라 아예 빼먹고 못읽을 뻔했다. 술 한잔 따르고 바로 읽어야 했다는데 삼촌들이 순서를 착각했다. 조상이 음식을 맛보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읽었다.
현관 문도 조금 열어 놔야 영혼이 들어올 수 있다는데, 문도 깜빡하고 나중에야 열었다. 정말 우리 맘대로, 제멋대로 제사..
뭐 이리 다 쓸데없이 어렵나 싶은 제삿날이었다. 근데 옛 사람들이 이렇게 어려운 절차를 만든 건 예와 정성을 다하라는 뜻보단 '우당탕탕' 정신없게 볶아보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맞대고 고민도 하고, 내년엔 좀 더 잘해보자 으쌰하고, 짜장면도 시켜먹고, 곱창도 사다 먹고, 왁자지껄 시간이 지나갔다.
제사가 허례허식이라느니, 영혼이 진짜 찾아오니 마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냥 아빠를 생각하며, 혹은 아빠를 매개로 주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무언갈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좋다. 일년에 한번쯤은 그렇게 하고 싶다.
그 다음해인 2023년 4월 초하루도 토요일, 또 주말이었다. 숙모는 "아주버님이 사람을 좋아하긴 하나봐요~"라고 했다. 엄마는 아빠 제사에 숙모들까지 오진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감사하게도 3년 내리 오셔선 음식도 함께 해주시고, 하룻밤 묵은 뒤 서울 투어까지 함께 하고 내려가셨다.
올해 4월엔 네번째 제사가 있었다. 올해는 두 삼촌, 그리고 서울 생활을 최근 시작한 두 사촌 동생만 와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아주 최근엔 할아버지 제사가 있어서 모였고, 여름 휴가를 같이 가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맏이인 아빠 먼저 가셨지만 남은 가족들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
1년에 한번뿐이 제사가 아니더라도 엄마와 난 아빠 이야기를 많이 한다. 처음엔 눈에 안보이게 하는 게 쉬울까 싶기도 했지만, 처음만 힘들지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게 치유와 회복엔 더 좋은 거 같다.
우리집 거실 한가운데는 여전히 큼지막한 가족사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일할 때 주요 부처 연락처를 찾으려 즐겨찾기해둔 사진첩에 하루에도 몇번이나 들어가는데, 즐겨찾기에 아빠의 옛 사진들도 있어서 역시 매일 보게된다.
아빠를 기억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 일상은 아주 많이 바뀌었다.
엄마는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아주 바쁘다. 가정에만 헌신하던 엄마는 오래 전부터 버킷리스트였던 지방 곳곳 사찰 성지순례의 꿈을 실현 중이다. 몇달 전 독립해 나온 내가 집에 놀러가려 해도 엄마가 집에 없을 때가 많다.
난 엄마가 놀러다니는 지금이 너무 만족스럽다. 마치 시청자들이 박신혜 배우가 철부지 부자집 막내딸 역할을 맡아 땡깡부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 심리처럼, 난 엄마가 여행 다니느라 바빠 우리 밥은 알아서 챙겨 먹으라며 무신경한 그림을 예전부터 상상하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엄마는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말도 많고 활력이 넘치는 '핵인싸' 성격이었단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엄마는 여전히 새벽 대여섯시면 절에 다녀오지만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 아빠 계실 땐 나가기 전에 아침 요리를 하고, 8시까지 집에 돌아와 아빠와 우리 밥상을 차려줬지만 지금은 감감 무소식(?)이다. 절에 간 김에 신도분들과 수다 떨며 차 한잔 마시고 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콩나물 국밥을 아침으로 해결하고 들어오기도 하고, 요샌 거의 항상 등산까지 하고 들어오신다. 엄마의 등산 체력은 어마어마해져서 2년째 설악산 봉정암도 다녀오셨다.
오전엔 요가, 댄스 등 문화센터 수업에 가고, 오후 네시쯤엔 요양보호사로 출근한다. 엄마가 아빠 가신 뒤 많이 슬퍼하면 어쩌나 했는데, 엄마는 현명하게 주변 사람들과 복닥복닥 살아가고 있다. 엄마에게 손을 내미는 주변 사람들이 많은 덕인 것 같고, 내겐 없지만 종교의 힘도 큰 것 같다.
나는 이번에 2019~2021년의 일기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내게 이렇게 우울했던 시기가 있었구나. 지난 후 돌아보니 그 시기는 우울증에 가깝거나 그게 맞았던 거 같다. 무기력이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이다.
2022~2023년 내 모토는 '즐겁게 살자', '맘껏 놀자'여서 그야말로 일하고, 일하다 만난 사람들과 놀고, 치열하고도 재밌게, 그리고 별 생각없이 살았다.
어느 정도로 걱정이 없었냐면, '걱정을 없애주는' 길몽을 친구에게 팔기까지 했다. 내가 어떤 꿈을 꿨는데 그 꿈의 해몽이 '걱정이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믿을 건 못된다지만 친구는 당장 그 꿈을 자기한테 팔라고 했다. 난 그러자고 했다. 내겐 딱히 떠오르는 걱정이 없어서 걱정을 사라지게 한다는 그 길몽이 필요하지 않다 생각했다.
내게도 직장, 인간관계, 커리어, 재테크, 연애 등 고민이 있긴 하겠지만 그 모든 게 '내 고민'이란 사실에 행복하고 감사하다.
결혼한 선배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힘듦은 '다른 사람에 대한 걱정'에서 주로 온다고 한다. 아이가 아픈 상황, 누군가 육아휴직을 해야 하는 상황, 양가 부모님이 아픈 상황 등이야말로 정말 멘탈을 흔드는 걱정이라고 한다.
최근 나는 자기개발에 진심인 2~3년을 보내보자는 목적으로 독립을 결정했다. 마음 먹은 속도대로 안되고 있긴 하지만, 혼자 사는 집에서 책 읽고, 글쓰고 하는 요즘이 참 평화롭다.
2019~2021년의 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 이야기가 아픈 가족을 둔 누군가에게, 끝없는 터널같이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시간이 흘러야 해결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시기는 내가 아무리 애써도 나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 나는 멈춰있는 것만 같던 그 시간도 돌아보면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일기 쓰기를 해보았다. 실제로 지금 보면 절대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나와 이보다 더 잘 맞는게 있을까 싶은 직업을 갖기 위해 성장한 시간이었고, 아빠와 보낸 마지막 소중한 시간이었고,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시간이었다.
언젠가 또 힘든 시기가 오는 날이 있겠지만 그땐 조금 더 무던하게 대응할 수 있을 거 같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현재에 그저 충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