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싫은 사람들

by 에센티아

나흘간의 설 연휴를 맞아 지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짧은 2월 한 달이 연속된 빨간 날들로 인해 괜스레 더 빨리 흐르는 것 같은 착시를 느낀다.


직장인이나 학생들에게는 꿀 같은 휴식일 명절이 내게는 엄청나게 반갑지만은 않다. 퇴사 이후로 입장이 바뀌고부터, 내게는 일상의 루틴대로, 내 페이스대로 지낼 수 있는 평일이 가장 쾌적하게 여겨진다. 예전 같았으면 목을 빼고 오매불망 학수고대했을 달력의 빨간 날들이, 이제는 정반대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달력의 빨간 날들 = 인파가 북적대고 차가 막히는 날, 루틴이 깨지는 날, 노동의 날'

photo-1588453251771-cd919b362ed4.jpg?type=w1 © hudsoncrafted, 출처 Unsplash

그런가 하면, 결혼하고 나서 그 의미가 완전히 바뀌게 된 날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명절이다. 한국에서 맞을 수 있는 국가 공인의 유일한 긴긴 연휴는 추석과 설 뿐이다. 결혼 전 이 두 명절은 내게는 무조건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했다.


"(결혼 전) 명절 = 해외여행, 긴 자유의 시간"


맘먹고 유럽이라도 다녀오려면 최소 열흘은 잡아야 하는데, 눈치를 보더라도 연차휴가와 꾸역꾸역 붙여서 다녀올만한 시기는 그야말로 명절이 제격이었다. 그렇게 일 년에 딱 두 번을 삶의 낙으로 삼으며, 고난의 직장 노예의 삶도 간신히 참고 견딜 수 있었건만. 대구 출신 경상도 사나이와 결혼을 하자, 그 삶의 낙은 요단강 너머로 영영 물 건너 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어떤 날들의 의미는 영원히 바뀌게 된다.


"(결혼 후) 명절 = KTX 타고 이동하다 볼 일 다보는 날, 제사, 형식적이기 그지없는 가족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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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명절이라 하면 그냥 긴 휴가에 불과했지만, 시댁은 '제사'라는 것이 있었다. 시집을 가서 나는 TV에서나 보던 '큰집'이라는 어마 무시한 타이틀의 실상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시집오기 전에 그나마 간소화되었다는 제사상 차림,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이제는 일부 형제분들만 잠깐 얼굴을 비친다는 집안 분위기를 귀띔으로 들었음에도, 내 눈에는 입이 떡 벌어지는 가짓수였다.


라면밖에 끓일 줄 모르는 내가 저걸?


다행히도 시어머님은 상당히 '깨어계신 신여성'이셔서 며느리에게 무리한 강요나 압박을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다. 내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고 계셨기에 제사 음식도 작은 어머님과만 준비하셨다. 어차피 나 같은 주방 초보는 일찍 가봤자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었으니.


명절 전날 도착해서 명절만 후딱 세고 나면 친정으로 이동하는 것도 당연시 여겨주셨다. 이 정도면 드라마에서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던 무시무시한 시댁 괴담과는 동떨어진 상당한 합리적인 시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시댁 복이 있음에 깊이 감사하며, 시부모님과 대면하였을 때는 아주 깍듯이 대하고 있다.


그러던 중 해가 갈수록 명절날 제사에 대한 의문이 내 안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복잡한 가족사로 인해 명절날 형제들이 다 모이지 않고 있는데도, 여전히 상다리가 부러지게 제사상을 준비하시는 시어머님을 보며 제멋대로 연민을 느꼈다.


막무가내 시댁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 사실에만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일까? 어차피 시댁인 대구와 친정인 청주를 성지 순례하듯 돌고 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모처럼 만의 연휴를 길바닥에서 다 보내야 했다. 대체 이것이 누구를 위한 명절인겨?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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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만 9단인 내게는 신여성이신 시어머님도 분명 제사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리고 계시는 게 느껴졌다. 맞이라는 아무런 득도 없는 멍에를 뒤집어쓴 채, 명절이면 돈만 몇 푼 쏘고 외국으로 홀랑 나가버리는 동서들을 보며 퍽도 억울하실 터였다. 하지만 둔감한 집안 남자들은 전통과 관습에 지각이 마비되어, 관성처럼 의미를 잃은 제사상 앞에 주야장천 절을 올리고 있는 듯했다. 어머님들의 허리와 손목 디스크 관절을 사뿐히 즈려밟고. 아, 명절날 제사상이 대체 뭐길래!


조상 공경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과 신념을 바탕으로 갖추어진 의식을 행해야겠다면 그런 사람들은 하라 그래. 남의 사는 방식을 말리거나 관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일이 된다면, 나는 철저하게 그 의미를 규명하고 따져본 뒤, 납득이 되고 감당이 되는 형태로 추진하리라! 지금과 같이 먹지도 않을 음식들을 잔뜩 만들어, 오지도 않을 이들을 위한 제사상을 차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린플루언서가 되기로 선언한 판인데! (경상도 제사상에 오르는 고래고기도 절대 사절이다!)


현재 민간의 제사상은 심지어 6.25 이후 60년대에나 정립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속학자들도 있다. 그눔의 전통 전통하는 이들은 그 역사적 근거를 스스로 먼저 탐구 및 고증해보고, 진정한 가족애에 대한 본인의 마음자세를 성찰하며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서 법도니 뭐니, 원래부터 이렇게 해왔다는 소리를 작작해대는 말을 들을 마흔 이하의 한국 며느리는 아주 그냥 없다고 보면 된다. (내가 왜 이렇게 흥분을 하지?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깊은숨을 가다듬고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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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덕분에' 지난 추석에 이어 올 설에도 결국 고향 방문은 자제하였다. 그렇다 해서 어디 딱히 여행을 갈 만한 상황도 아니니, 내게는 뭐 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그냥 긴 연휴일뿐이다. 다만, 이 시국을 계기로 명절날 힘겹게 차리던 제사상을 어머님이 이제는 더 이상 차리지 않으셨으면 싶었다. 끝끝내 어머님은 변함없이 상을 차리시고, 우리 가족도 랜선으로 제사를 올리고 말았지만. 영상으로 상 위에 수북이 쌓인 제사 음식을 보며, 마음 한구석에 쓸쓸한 그늘이 드리워옴을 느꼈다.


어차피 어머님이 내려놓으시지 않는다면, 내 대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 문화가 대 혁명을 맞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어도 짐작은 하고 계시리라. 그전에 부모님 레벨에서 결단을 감행하시고, 가족끼리 함께 여행을 가거나, 근사한 식사를 하며 잊지 못할 추억을 더 많이 만들어 갈 수 있는 명절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명절날의 원치 않는 노동과 희생은 사라져야 한다. 귀신을 챙기기 전에 제사상 한번 차리고 나면 으레 몸살로 몸 져 누우시는 이 땅의 어머님들이 원혼이 되지 않을 수 있게 말이다. 명절의 의미가 영영 곤혹으로 바뀌어 버린 이들이 더 이상은 없었으면 싶다. 명절에 진짜 필요한 정신은 바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니까.

SE-c37204f7-721a-43d7-9dca-4051d8246f9c.jpg?type=w1 © nate_dumlao,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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