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지금, 여기서만 즐길 수 있는 맛
어느덧, 시골 살이 4주 차가 되었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자연을 들여다보며 사는 것이 여전히 설레고, 좋다.
이곳에 오고 나서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제일 크게 바뀐 부분이 있다면, 음식일 것이다. 도시에서는 매일 냉동식품, 배달음식, 외식만 주로 했었다면, 시골에서는 집밥이 주가 되었다.
여기는 배달도 중국집 한 곳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 스스로 밥을 만들어 먹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마트에 가서 냉동식품을 사 오기도 했지만, 이제 4주 차가 되니 스스로 만들어 먹을 줄 아는 반찬도 하나둘씩 늘어나게 되었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었던 반찬들은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탓일까? 그다지 맛있게 즐기지 못했었는데, 스스로 작물을 캐고, 다듬고, 요리를 해 먹으니 이렇게 꿀맛일 수가 없다.
고기반찬이 없더라도, 반찬 수가 적더라도 직접 해 먹는 밥은 그 어떤 맛집보다 맛있었다.
프로그램을 주최하는 대표님께서 직접 밭에서 약을 치지 않고 기른 신선한 노각, 가지, 토마토.
(나와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참가자분께서는 노각을 보고 바나나인 줄 착각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노각을 들고 온 그날 저녁에 바로 해먹은 노각 무침.
아직 재료도, 할 줄 아는 요리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마트에서 훠궈 소스를 사 와서 각종 채소와 고기를 넣어 마라탕을 해 먹었다. 생각보다 노각무침과 마라탕이 잘 어울렸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요리(?)라는 것을 해보았다. 우리가 좋아하는 된장찌개에 고기를 넣어 맛을 더 살렸고, 애호박과 두부를 가득 넣어 먹었다.
몇 년 전에 집에서 된장찌개를 만들어 가족들과 나눠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많이 부족한 맛이었다면 지금은 많이 풍부해진 맛이다.
매주 월요일 저녁 2시간은 북 치는 시간이다. 장구를 쳐보신 분들은 장구를 연습하고, 나와 같은 초보자들은 북을 연습한다.
‘북 치는 게 뭐가 재밌어?’라고 생각한다면, 직접 쳐보시기를 권장드린다. 스트레스 푸는 데에는 이보다 좋은 게 없다. 누군가로 인해 스트레스를 잔뜩 받는 날이 있다면, 그 사람을 생각하며 북을 매우! 매우 쳐라!
보통 1시간 연습하고, 간식 시간을 가지는데 기존에 장구와 북을 배우시는 어르신들께서 과일과 떡 등 먹을거리를 잔뜩 들고 오신다.
이날의 간식은 처음 들어본 모시떡과 달달한 샤인머스캣이었다. 모시떡은 쑥떡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쑥떡보다 훨씬 향이 덜하고, 안에 콩고물이 들어 있어 고소하게 즐길 수 있었다. 샤인머스캣은 마트에서 사 먹는 것보다 더 달달하고, 즙이 가득한 게 맛있었다.
북 치고 - 먹고 - 북 치고
최고의 힐링 시간이다.
마당에 심겨 있는 감나무에서 즉석으로 따먹은 홍시.
원래 곶감을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갓 따먹은 홍시의 맛은 더 특별하다. 잊을 수 없는 달달함에 함께하는 사람들과 몇 번이고 정신없이 따먹었다.
굳이 돈 주고 사 먹지 않더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미래의 우리 집 마당에도 감나무를 하나 심어 두고 싶다.
1기 프로그램 참여자분들께서 심어 놓은 고구마를 우리가 캐게 되었다. 앞쪽 라인은 서툰 솜씨로 고구마가 별로 없었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많은 양의 고구마가 발견되었다. 30도가 넘어가는 땡볕의 더위였지만, 고구마를 하나씩 캘 때의 그 짜릿함이란! 몇 개 집에 들고 가서 쪄먹었는데, 역시나 꿀맛이었다. 조금만 챙겨 온 내가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시골에서는 ‘때’가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먹을 수 있을 때, 가져갈 수 있을 때, 미리 잘 챙겨 놓으라고. 때를 놓치면 못 먹는다고.
고추장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드다니!
시골에 오기 전부터 간장, 된장, 고추장을 직접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직접 농사를 짓게 된다면, 내 작물을 이용하여 각종 장과 요리에 도움 되는 재료들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고추장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다니.
똑같은 기본 레시피를 전수받더라도 각자의 입맛이 다 다르기 때문에 맛도 다 다른 형태의 고추장들이 탄생했다. 달달한 맛이 자꾸 손이 가는 나만의 고추장!
고추장을 만들어 온 바로 다음날에 주꾸미 목살 볶음을 만들어 먹었다. 설탕을 넣지 않더라도 고추장의 달달함이 가득하여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개인적으로 주꾸미 보다 고기에 이 양념장이 배였을 때가 더 맛이 좋았다.
이 날도 북 치기 연습을 1시간 정도 하고, 간식 시간이 시작되었다. 족발은 한 어머님께서 직접 집에서 삶고, 간장 양념을 하셨다고 하는데, 처음 하셨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맛이 좋았다.
족발 특유의 잡내가 싫어서 아무 족발이나 잘 못 먹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님께서 직접 삶아오신 족발은 놀라울 정도로 잡내 없이 고소하게 즐길 수 있었다. 쫄깃쫄깃하면서 부드러운 식감에 자꾸만 손이 갔다.
함께 먹은 매운 순대는 인생 순대였다. 평소 순대가 느끼해서 잘 즐기지도 않으면서도 양파가 있어야만 겨우 먹는 정도였는데, 세상에! 매운맛 순대라니. 시골에 오고 나서 매운맛이 너무 간절했던 나에게는 이 순대가 엽떡보다 맛있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자극적인 매콤한 맛이 쓰읍- 거리면서도 자꾸 손이갈 수밖에 없었다.
(이 순대를 먹고 며칠이 지난밤에 자꾸만 이 맛이 떠올라서 잠들 수가 없었다.)
프로그램 일정에는 없었지만, 한 어머님의 부탁으로 대추 따기가 시작되었다. 대추나무 한그루에 시골 밤하늘의 별처럼 정말 많은 양의 대추들이 달려있었다.
항상 대추는 갈색의 쪼글쪼글한 대추만 맛봐왔는데, 초록색의 대추는 처음 먹어보았다. 대추에 대한 큰 애정이 없었기에 바로 먹기 망설여졌으나, 한 입 먹자마자 ‘내가 이맛을 이제야 알았다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단 맛 빠진 사과맛이랄까?
대추에 약간의 상처가 있거나 붉게 변해가는 아이들이 제일 맛있다고 한다. 벌레가 먹은 흔적이 있다는 건 달달하기 때문에 먹었을 때 더 맛이 좋다고 한다.
대추를 따면서 대충 옷에 슥슥 문질러 닦아내고, 한입씩 베어물 때의 맛이란. 달달한 부분을 다 먹었다면, 심지는 무심하게 다시 밭으로 던져낸다.
집 근처 둘레길에서 모시잎을 발견했다. 곧 기계로 풀정리를 한다는 말에 대표님께서는 다음날 아침 7시에 사람들을 모아 모시잎을 따왔다. 따온 모시잎으로 떡 반죽을 만들고, 다 함께 콩고물을 넣어 빚기를 시작했다.
재밌는 건 떡이 터질까 봐 콩고물을 적게 넣어 만들었더니 찌고 나니 맨 떡이 되어 있었다. (각 마을 경로당에 방문하여 떡을 나누어 드렸는데, 내가 빚은 떡을 드신 분들께는 죄송하다.)
시골 밥상이라고 해서 풀떼기만 먹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시나노골드 품종의 사과에 설탕과 물을 넣어 끓였을 뿐인데, 사과잼이 탄생했다. 사과잼을 버터롤과 함께 먹기도, 요거트에 넣어 먹기도 한다. 달달한 맛과 아삭함이 살아 있어 바쁜 아침에 먹기 딱이다.
직접 만든 고추장에 이어 청국장까지! 사실 청국장은 고추장과 같은 날에 만들었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해서 며칠이 지나고 먹을 수 있었다.
청국장 특유의 향이 강할 거라 생각해서 처음에는 반갑지 않았지만, 대표님께서 일부러 향이 강하지 않도록 햇볕에 말려둔 탓에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된장찌개에 청국장 한 스푼 떠서 넣어 봤는데, 적당히 진한 맛이 밥 한 공기를 순식간이 비워내게 만들었다.
(반찬 세 종류는 같은 프로그램 참여자분께서 주셨는데, 정성이 들어 있어 더 맛이 좋았다.)
밭에서 따온 가지와 애호박, 그리고 직접 만든 청국장으로 만든 저녁밥.
날이 갈수록 요리 실력이 느는 듯하다. 사실 반찬의 종류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이렇게 하루하루 직접 밥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 자체에 뿌듯함이 느껴진다.
수경재배로 자란 부드러운 상추와 청국장으로 만든 강된장.
처음 만들어 본 강된장은 엄마가 해준 맛보다 한없이 부족한 맛이었지만, 반나절이 지나고 청양고추를 썰어 다시 먹어보니 맛이 더 좋게 변했다.
또다시 감사하게도 반찬 선물을 받게 되었고, 짜파게티와 함께 먹으니 최고의 궁합이었다.
시골에서는 부지런하기만 하면 굶어 죽을 일이 없다지만, 이렇게 주위에서 정이 넘치도록 챙겨주니 오히려 채소만 먹어도 살이 찔 것 같다.
시골에서는 모르는 만큼 못 먹고, 아는만큼 먹는다. 뒷마당에 있는 풀이 달래일줄이야! 보물같은 발견이다.
뒷마당에서 캔 달래로 만든 달래무침과 공동 텃밭에서 캔 대파와 쪽파로 계란 볶음밥과 계란부침개를 만들었다. 직접 다듬은 재료로 아낌없이 팍팍 넣어 만들었기 때문에 맛이 좋을 수밖에! 오늘도 빠지지 않는 된장찌개에는 직접 만든 고추장과 청국장이 필수로 들어 있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직접 만든 막걸리라면 말이 달라지지! 아직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맛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기다려진다.
사진으로 미처 남겨두지 못한 맛있는 시골밥상이 여럿 있지만,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은 나의 시골 밥상이 기대된다.
직접 땀 흘려 재배하고, 만들어 먹고, 나눠 먹으며 ‘이게 사람 사는 거지 ‘를 느끼고 있는 요즘.
한 달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아쉽지만, 남은 한 달은 매 순간순간이 잊히지 않도록 더 끌어안아 느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