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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Jun 24. 2021

바람 부는날 캠핑 이야기

내  젊은 날을 추억하다.

이번 캠핑은 처음부터 꿩 대신 닭이었다.

4박 5일의 멋진 여행 대신 1박 2일로 줄어든 일정, 날씨조차 흐림 또는 비였다.

게다가 이틀 전부터 기력을 잃고 소화불량을 호소하고 계신 할머니 한분.

뭐하나 나의 짧은 캠핑을 도와주지 않는데 얼마나 흥이 나겠는가.

한 가지 특별한 게 있다면 이번에는 휴가를 받은 아들이 우리와 동행한다는 것.

성인이 된 아들과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이 늘 그러하듯 기대하지 않을 때, 또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경험하게 되는 특별한 순간이 있지 않나.

이번 캠핑에서도 나는 바람과, 흔들리는 나무와, 음악으로 만들어진 좌표 어디쯤에서 잠시 잠깐 젊은 나를 느끼는 멋진 경험을 누렸다.




여행의 출발은 언제나 가볍다. 

그제가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일상을 사는 나에게 여행은, 그것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잠을 자는 일상에서의 탈출은 그 자체만으로도 숨통 트이는 일이다.

더구나 이번 캠핑은 다 큰 아들과 함께다.

이미 두 달 전 Zion으로 캠핑을 다녀왔던 남편은 그때 사용했던 장비들을 다시 꺼내 차에 싣는다.

1박도 박은 박이니까. 텐트와 침낭, 코펠 등을 빠짐없이 챙겨 넣는다.

무엇보다도 식당용 사각 고추장 깡통으로 만든 모닥불 통을 살뜰하게 구석에 쑤셔 넣는다.

이미 그 효율을 인정받은 수제품 우리 집 캠핑용품이다.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캠핑장에서 남자 둘이 능숙하게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지핀다.

순식간에 텐트가 쳐지고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캠핑 왔음을 실감 하기 시작한다.

궂은 날씨로 구름이 잔뜩 끼어 별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남편의 모닥불 통은 날름날름 장작을 집어삼키며 아름다운 불꽃을 토해낸다. 

일상에서 벗어난 우리들은 별 말없이 타오르는 불꽃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삼 인용 텐트에서 성인 남자 둘과의 잠은 불편 그 자체다. (그러려고 나온 거잖아!!!)

게다가 강아지 보리까지 한 자리를 차지하니 끙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즈음이었다. 후드득후드득 텐트 위로 빗방울이 쏟아지더니 세찬 소나기가 한참 쏟아진다.

굵은 빗방울과 쏟아지는 빗소리에 반해 다행히 텐트 안으로는 빗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하지만 뒤이어 불어대는 세찬 바람소리는 너무 이른 새벽부터 나를 깨우고 만다. 

이러나 저러나 이번 캠핑은 날씨 운이 없다.


엊저녁의 남은 밥과 라면으로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느긋하게 모닥불가에 앉았다.

믹스커피 한잔을 마시는 동안에도 불순한 날씨는 갈수록 변덕을 부린다. 

서너 시간 거리의 트래킹을 하기도, 호수에서 카약을 타기도 어려울 것 같은 날씨다. 아쉽지만 괜찮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계획 없이 점점 줄어드는 장작들과 불꽃만 무심히 바라본다.


어느 순간 어두운 구름과 밝은 햇살이 교대로 이어지더니 세찬 바람을 만들어낸다.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하고 낯선 날씨이다. 

6월의 바람은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채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불어댄다.


급기야 불꽃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올려 바람 부는 하늘을 바라본다. 

높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모습이 어찌 보면 신비스럽다.

나는 그 모습에 넋을 놓은 채 한참 동안 쳐다본다.



그때였다. 아들의 전화기에서 한곡의 사랑스러운 노래가 흘러나온 것은.

맘마미아의 'Our last summer'이다.


I can still recall our last summer.

I still see it all.

Walks along the Seine 

Laughing in the rain 

Our last summer  

Memories that remain.


https://youtu.be/CyUZe8xRNnQ



감미로운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던 어느 순간, 내 기억의 자물쇠가 스르르 열린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의 last summer, 나의 청춘, 나의 젊은 날이 노래와 함께 흘러나온다.

바람결에 너울너울 춤을 추는 나무는 내 여름날의 기억들과 어우러져 춤을 춘다.

고독했지만 사랑했고, 가진 것 없이 다 가졌고, 뛰는 가슴으로 춤추고 노래하던 때.

환한 미소가 퍼지는 찰나의 순간, 기억은 환상 속 불꽃놀이처럼 터져 올랐다가 다시금 잦아들고 만다.

멜로디와, 노랫말과, 기억들과, 내 젊은 날과 내 삶의 여름이.


감정으로 가득 차오르던 시선을 다시 모닥불로 내려놓자 눈에 들어오는 청춘의 아들과 중년의 나.

인생의 여름을 지나고 있는 아들과 깊은 가을 어디메쯤에 머물고 있는 내가 있다.


방향 없이 흔들리는 나무들과 세찬 바람, 감미로운 노래가 만들어낸  그 짧은 순간.

나는 궂은 날씨도, 할머니에 대한 걱정도, 짧은 일정에 대한 아쉬움도 모두 잊고 멀리 시간여행을 다녀온다.

나의 지난여름 같은 젊은 날로.


그 시간여행은 이제는 가을 같은 내 삶에 잔잔한 공명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공명은 단조로웠던 나의 일상을 조금 다른 색으로 바꾸어놓는다.


날씨도, 마음도, 여건도 미흡해서 큰 기대 없이 다녀온 1박 2일의 짧은 캠핑.

그 가운데 만난 짧은 순간의 여름 같은 젊은 날의 기억과 환상 그리고 기쁨.


어쩌면 그런 순간을 위해 나는 또다시 침낭을 챙기고 라면을 챙겨 집을 나설지도 모르겠다.

내 지난날을 추억하기 위해, 아름다운 기억들로 지금을 채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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