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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Nov 30. 2021

딸 생일날, 우리가 받은 선물

생일을 진정으로 기념하는 일은 부모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

딸 생일이었던 지난 일요일 아침.

나는 필라델피아 외곽 도시에 있던 쉐라톤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나에게 주어진 네 시간의 휴가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함께 묵었던 남편은 새벽 5시 40분쯤 데리러 온 딸의 차를 타고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그날은 딸의 생일이면서 동시에 남편이 생애 처음으로 참가하는 풀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아마도 딸은 차량 진입이 통제된 부근까지 아빠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34년 전 저를 낳느라 수고한 엄마에게는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선물하느라 함께 데리고 온 강아지까지 저희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선물 받은 네 시간 동안 나는 나 혼자만의 아침을 어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누릴 수 있었다.


남편의 마라톤 참가는 어느 날 저녁밥상에서 이루어졌다.

" 풀 마라톤을 뛰어볼 생각으로 준비 중이야. 아마, 내년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빠의 말에 재빨리 마라톤 정보를 찾아보던 딸아이가 11월에 필라델피아에서 마라톤대회가 있다는 것을 검색해 알려줬다.

"앗, 그런데 그날이 내 생일이네."

"그래? 그렇다면 이것은 아빠의 운명이다. 당연히 뛰어야 해."

마라톤이 하필 필라델피아에서 열리고, 마침 딸아이가 필라 근처에 살고, 게다가 그날이 딸의 생일이라니!!

의미론자 남편에게는 참가해야 할, 그리고 생애 처음의 풀마라톤 완주를 딸아이에게 선물해야 할 의미와 동기가 생긴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삶의 이벤트는 딸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준비가 되었다.

딸집 근처의 좋은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하고, 아빠를 돕기 위한 딸 부부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사위는 집에서 강아지들 데이케어를 전담하고 딸은 아빠를 대회장소까지 실어 나르는 역할.

남편이 풀 마라톤을 뛴다는데 그의 절친이며 배우자인 나는 원님 덕에 나팔만 불었다.

긴장한 채 뛰러 나가는 남편을 호텔방 문 앞에서 파자마차림으로 배웅했을 뿐 딸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나 홀로 느긋하고도 호사스러운 일요일 아침을 보냈다.


딸 생일날 아침을 이래도 되는 걸까?

딸 생일날, 부모인 우리는 딸로부터 절대로 의도하지 않았던(?) 멋진 선물을 받은 셈이다.




결혼한 뒤 첫 번째 남편 생일즈음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생일을 앞두고 나에게 쇼핑을 가자고 했다.

선물을 사드리고 싶단다. 자신이 아닌 어머니의 선물을.

"느닷없이 어머니 선물은 왜??? 그것도 어머니 생일이 아닌 당신 생일이잖아??"

"나를 낳아주셨고... 이렇게 자라서 결혼까지 했으니까..."

갸우뚱거려지기는 했지만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도 같았다. 내 생일은 어머니의 노고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쇼핑에는 젬병인 우리는 몇시간을 고르고 골라 네이비블루색 핸드백을 사들고 집으로 갔다.

결혼 후 첫 생일상을 차려주신 어머니는 아들이 건네는 핸드백을 받아 들고 더없이 행복한 웃음을 웃으셨다.




마라톤이 열리는 필라델피아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남편이 보내주는 현장의 사진들만으로도 흥분과 긴장이 느껴졌다.

남편이 아무리 그동안 훈련을 해왔다 하더라도 역시 실전은 실전 일터, 26.2마일의 장거리를 뛰어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세상에 나온 지 34년을 맞은 딸이 그를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지 않나.

그의 마음엔 '뛰어야 할, 완주하는 아빠'라는 선물, 딸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는 끝내 풀 마라톤을 완주하는 아빠의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었다.


(아직은 미소를 머금은채 뛰고있는 내 절친)


남편이 흥분과 긴장의 아침을 맞고 있었다면 나는 더없이 느긋한 아침을 침대 위에서 맞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고 지난밤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깨끗한 린넨의 청결한 냄새와 촉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 어떤 것의 방해도 없이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남편이 보내오는 카톡 소리가 거슬릴 만큼 그 순간은 온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진정 나에게 그런 고요와 평화가 얼마만이던가.

자식을 낳아 34년을 키워 내보내면 이런 삶의 순간을 선물 받는 것인가?

어머니가 아들이 선물한 가방을 가슴에 안고 기뻐하던 것처럼 나도 이 삶의 순간이 기쁘고 좋았었다.


(커피를 내리면서 바라본 호텔방안 모습)


선물이란 '주고 싶은 마음'이다.

특히 생일선물은 그 누군가의 태어남을 기뻐하며 주고받는 것이다.

그동안은 아이들의 태어남을 축하하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다면 이번에는 태어나게 해 주어 감사하다는 선물을 거꾸로 내가 받았다.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생일을 기념해 어머니에게 선물을 드리는 아들과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이해는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별스럽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내 생일을 진정으로 기념하는 일은 살아계신 부모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딸의 34번째 생일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남편은 자신의 생애 첫 풀 마라톤 완주를 자신과 딸에게 선물한 딸의 생일이었음으로,

나는 낯선 멋진 곳에서 4시간의 온전한 나만의 평안한 순간을 선물 받았었음으로...

딸, 태어나줘서 고맙다. 

(그날 마라톤 완주를 한 모든이들에게 축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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