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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Mar 16. 2021

61살 생일을 기념하기로.

조금은 특별한 생일을 맞으며 들어지는 단상

첫 번째 단상. 

61살 생일을 기념해서 밤나무, 대추나무를 심기로 한다.


"당신 환갑 생일인데 무슨 선물을 받고 싶어? 평생 해준 적 없는 반지나 목걸이 같은 것 선물해줄까?"

"반지는 무슨... 손가락 관절염으로 마디마다 굵어져서 반지가 가당키나 한가? 목걸이도 나는 잘 안 하잖아. 

그동안 심자고 노래 불렀던 밤나무, 대추나무나 심자."

"그럴까? 그러자 그럼."


우리 부부는 이번 봄 내 생일을 맞아 무슨 뜻깊은 일을 할까 고심을 한다.

재작년 남편의 환갑 때는 함께 한국에 나가서 남편의 가족들과 함께 생일상을 나누었고 무엇보다 남편의 고향을 찾아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왔다.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집, 여섯 번이나 전학을 다녔다는 시골 초중고등학교들, 여전히 개발이 덜되어 그 흔적이 남아있는 시골 동네에서 남편은 자신의 60 평생을 되돌아보았고 그런 뒤 홀가분하게 새로운 한 해 한해를 맞이하고 있다.

올해 환갑을 맞는 나 역시도 그럴 계획이었으나 코로나 팬데믹은 모든 계획을 엉클어버렸다.

한국의 가족 방문은 어렵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섭섭해서 남편과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여행은 여행이고, 남편의 고향순례대행진처럼 무엇인가 60 갑자 삶을 기념할만한 것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바로 기념식수.

그것도 내가 그렇게 곁에 두고 싶었던 밤나무와 대추나무 심기.


나는 충무로에 있는 '한국의 집'에서 전통혼례를 치렀다.

6월 말경의 무더운 날. 치렁치렁한 한복에 족두리와 전통혼례복을 걸치고 장시간에 걸쳐 치러낸 결혼식의 마지막은 폐백이었다. 덥고 지친 신부가 양쪽의 시당숙모와 시고모의 부축을 받으며 시어른들께 큰절을 올리자 시어머니는 폐백상에 놓인 큰 밤과 대추를 두 주먹 가득히 움켜쥐고는 길게 펼쳐진 손싸개 위로 넉넉하게 던져주셨다. 그때 고개를 숙인 채 바라본 흰 천위의 대추와 밤은 어린아이 주먹만 하게 크고 윤기가 났었다.

그런 밤과 대추를 주렁주렁 열매 맺는 나무를 심고 싶었다. 언젠가 땅이 있는 집에 살게 된다면.


나의 그런 소망을 이번 61번째 생일에 이루었다.

멀리 조지아주에서 보내진 나무는 각각 두 그루씩이다.

이제 겨우 어린아이 키만 한 어린 나무들이니 그것들이 뿌리내리고 더 자라 꽃을 피우고 언제 열매를 맺을지는 알 수 없다. 대추는 올해 지나 내년에 열매를 볼 수 있을 거라는데 밤은 몇 년은 족히 묵어야 하나 보다.

대신 밤나무는 하늘 높이 키를 키우고 둥치를 키울 것이다. 그 많은 밤송이들을 달고 있으려면 그래야겠지.

그렇게 한참이 흐르고 나면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큰 대추와 밤이 열릴까?

폐백을 올리며 받았던 그 대추와 밤같이 크고 윤기가 날까?

그때까지 한해 한해 시계 바퀴를 밟으며 살아봐야겠다. 

봄을 맞으며, 여름을 누리고, 가을을 보듬고, 겨울을 꿈꾸면서.



두 번째 단상. 

이제부턴 무심한 소처럼 살아야지.


내 손안에 엄마가 나누어준 땅콩 캐러멜이 여러 개 있다. 큰 봉지를 뜯어 우리 자매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 것인데 나를 제외한 언니들은 벌써 다 먹어버렸다.

나는 언니들처럼 지금 다 먹지 않을 것이다. 주머니에 넣고 두고두고 먹을 생각이다.

셋째 언니가 그러는 나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나를 데리고 마당 한가운데 있는 우물가로 데려간다.

"00야, 네가 가지고 있는 캐러멜 나 좀 주라. 안 주면 나 여기에 풍덩하고 빠져버릴 거야!!"

"엉?? 왜 그래? 엉엉엉.. 그러지 마! 내 것 다 줄게, 엉엉엉.." 

예닐곱 살짜리 나는 언니가 정말 우물에 빠질까 봐 겁이나 울면서 얼른 내 것을 언니에게 다 주어버린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우연히 언니들이 보낸 편지를 보게 된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던 언니들이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편지를 엄마에게 보낸 거다.

그날부터 나는 조금씩 용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은 돈 천 원을 엄마 편지에 함께 넣어 언니들에게 보낸다.

두 언니는 그 천 원짜리 지폐를 가위로 반절씩 나눠서 행운 부적처럼 책갈피에 넣고 다녔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결혼은 우리 부부에게 살림을 하나씩 장만하는 작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울산에 17평 아파트를 장만하고 그곳에 알맞은 살림살이를 마련했다.

그곳이 아담하게 채워질 즈음, 좀 더 큰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곳에 걸맞게 하나씩 장만을 해나갔다.

그러는 중에도 조금 지나치게 검소한 우리 부부는 만기 재형저축을 두 번이나 탔고 그것을 어디에 쓸까 고민도 하기 전에 서울 시부모님 집 이사하고 수리하는데 올려보내야 했다. 

몇 년이 지나고 나니 보내드린 나만 아쉬워할 뿐 그분들은 기억조차 못한다.




나는 소띠다. 

띠가 삶에 무슨 큰 상관이 있을까마는 마치 이름이 내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처럼 무슨 띠인가도 역시 약간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성격 형성에 띠는 조금 영향을 준 것 같다.

"소처럼 묵묵하게, 소처럼 성실하게, 소처럼 믿음직하게"살아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평생 동안.

게다가 소는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 제 살도, 젖도, 뼈도, 가죽도, 하물며 피와 모든 부산물까지도.

이런 메시지가 내 안에 소용돌이치며 늘 나는 "내어주는 삶"을 살도록 스스로 룰 이끌며 살아온듯하다.

우습다. 쥐뿔도 없는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적 삶을 살아오면서도 나는 늘 그 메시지에 압도되어 살았다.

왜 그랬을까? 소띠로 태어난 사람들은 우주로부터 그런 기질을 부여받는가?

아니면 역으로 그 해에 태어나서 '소같이 우직한 사람'으로 살도록 강요되어서 그런 것인가?


하여간 소띠 인간으로 60년을 성실히 살았으면 이젠 족하다.

새로운 육십갑자를 시작하며 이젠 '우직한 소'처럼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더 이상 나중을 위해,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위해 아끼지 않고 '지금'을 쓰고, '지금'을 누리며 살고 싶다.

바라나시 뒤 골목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한 마리의 무심한 소처럼.


하, 이것 정말 용기가 많이 필요한 일일 것 같다.

60년 동안 해온 삶의 방식을 새로운 갑자를 시작했다고 단박에  바꿀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육십갑자를 '그런 사람'으로 살았으니 새로운 육십갑자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봐도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슬그머니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웃음의 의미는 내가 꽤 괜찮은 생각을 해냈다는 소리 일터이다.


이래서 예순한 번째 생일은 조금 특별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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