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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천 Sep 14. 2021

15. 계획대로 걷지 않기로 했다

[100일 여행] 인버라난 → 클리안라리치, 2015년 8월 26일

풀밭에서 하늘을 보며 잠든 지 2시간 만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몽사몽 간에 비를 피해 공중 화장실에 틀어박혀 몇 시간이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덕분에 추위는 피했지만, 결국 한 숨도 제대로 못 잤다. 사람들이 일어날 시간이 되어서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어둠 속에서 비가 계속 내렸다. 오르막길이 대부분이라 금세 숨이 차오르는 데다, 배는 고프고 다리의 근육통은 풀리지도 않았다. 길 한복판에서 마주친 염소는(산양이었을지도) 왜 그리 무섭던지.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더니 다행히 숲 속으로 돌아갔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특유의 길게 찢어진 눈동자를 보니 왜 악마 숭배의 대상이 됐는지 알 것 같았다.

가장 구석 칸에 있는 변기에 주저앉아 잠을 청해봤지만 결국 한 숨도 못 잤다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는 오른쪽
부슬비 내리는 새벽이라 조금 을씨년스러웠다
텐트를 가져왔다면 나도 저러고 있었을까
공사 중이라 중장비 타이어 자국이 남아 있는 흙길이 한동안 이어졌다
기찻길 무단 횡단하면 벌금 1,000 파운드
미안하다 너네 보면서 소고기 생각이 많이 났다

졸음과 통증을 참아가며 걸어온 끝에 오늘의 목적지로 점찍어 뒀던 틴드럼(Tyndrum)과, 그 앞 마을인 클리안라리치(Cruanlarich)의 갈림길 앞에 섰다. 클리안라리치에 잠시 들러 WHW(웨스트 하이랜드 웨이) 패스포트 도장만 받고 다시 틴드럼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고통을 참고 계속 걸어간다면, 아마 오늘도 계획한 만큼 걸어내어 해가 질 무렵엔 틴드럼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해낸다고 이 여행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까? 회사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업무 쳐내듯 스케줄을 꾸역꾸역 소화하려고 들었던 스스로를 멈춰 세우고 잠시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아닐 것 같았다. 항상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이는데 익숙해져 있었지만, 최소한 이곳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무언가 증명할 필요 따위 없는, 그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걸어가는 길인데.


게다가, 곧 로우랜드를 벗어나 그렇게 기대하던 하이랜드의 풍경이 다가온다. 꼬맹이 시절 가장 좋아했던 인생 영화 <하이랜더>의 배경이었던 그 거친 산세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질 예정이다. 지치고 의욕 잃은 상태로 평생 동안 동경했던 풍경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예정보다 빨리 트래킹을 끝내고 좋은 호텔에서 푹 쉬기로 결정했다. 계획을 깨기로 결심했다.

클리안라리치로 들어가는 길
기차역 승강장 쪽으로 올라가면 간이식당이 있다
잠시 몸을 녹이며 간단히 요기를 했던 간이식당
오늘의 숙소인 클리안라리치 호텔
수시로 비가 내리던 스코틀랜드의 숙소에는 젖은 옷과 신발을 말리는 드라잉 룸(Drying Room)이 따로 있었다
근사한 풍경에 둘러싸인 곳
오늘 저녁은 피자다

기차역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요기를 하고, 클리안라리치에서 가장 커 보이는 호텔에 들어갔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호스트가 오지 않아 체크인이 늦어지고, 그새 또 배가 고파와서 일단 저녁을 먹으러 로비 층의 레스토랑부터 들러 피자를 시켰다. 혼자서 한 판 정도는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메뉴를 물으러 온 웨이터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게임과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은 또래 정도의 청년이었다. 마침 손님도 별로 없어서, <악마성 드라큘라>나 <FIFA> 같은 게임에 대해 한참 수다를 떨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신이 나서 개발에 참여했던 모바일 게임을 보여주니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가 담당한 부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 뒤로는 식사를 하는 내내 다른 손님에 비해 나를 특별히 신경 써주는 느낌이었다. 체크인 한 투숙객이 아닌 이상 알려주지 않는 와이파이 비번을 슬쩍 알려준 거랑 계산할 때 한 움큼 건네받은 사탕 정도가 그가 챙겨줄 수 있는 전부였지만, 진심 어린 호의가 참 기분 좋았다. 그 정도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저녁이었다.


다행히 식사 후 체크인도 잘 끝났고, 로비에 드라잉 룸이 있어서 진흙탕에 젖었던 등산화도 말려놓고, 따뜻한 방 안에서 느긋하게 샤워를 한 후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워 가벼운 마음으로 기대하던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목표한 대로 해내지 않아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던 하루. 계획을 깨길 참 잘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자다가 비 맞을 일도 없으니 걱정 없이 푹 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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