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여행] 인버라난 → 클리안라리치, 2015년 8월 26일
풀밭에서 하늘을 보며 잠든 지 2시간 만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몽사몽 간에 비를 피해 공중 화장실에 틀어박혀 몇 시간이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덕분에 추위는 피했지만, 결국 한 숨도 제대로 못 잤다. 사람들이 일어날 시간이 되어서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어둠 속에서 비가 계속 내렸다. 오르막길이 대부분이라 금세 숨이 차오르는 데다, 배는 고프고 다리의 근육통은 풀리지도 않았다. 길 한복판에서 마주친 염소는(산양이었을지도) 왜 그리 무섭던지.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더니 다행히 숲 속으로 돌아갔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특유의 길게 찢어진 눈동자를 보니 왜 악마 숭배의 대상이 됐는지 알 것 같았다.
졸음과 통증을 참아가며 걸어온 끝에 오늘의 목적지로 점찍어 뒀던 틴드럼(Tyndrum)과, 그 앞 마을인 클리안라리치(Cruanlarich)의 갈림길 앞에 섰다. 클리안라리치에 잠시 들러 WHW(웨스트 하이랜드 웨이) 패스포트 도장만 받고 다시 틴드럼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고통을 참고 계속 걸어간다면, 아마 오늘도 계획한 만큼 걸어내어 해가 질 무렵엔 틴드럼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해낸다고 이 여행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까? 회사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업무 쳐내듯 스케줄을 꾸역꾸역 소화하려고 들었던 스스로를 멈춰 세우고 잠시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아닐 것 같았다. 항상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이는데 익숙해져 있었지만, 최소한 이곳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무언가 증명할 필요 따위 없는, 그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걸어가는 길인데.
게다가, 곧 로우랜드를 벗어나 그렇게 기대하던 하이랜드의 풍경이 다가온다. 꼬맹이 시절 가장 좋아했던 인생 영화 <하이랜더>의 배경이었던 그 거친 산세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질 예정이다. 지치고 의욕 잃은 상태로 평생 동안 동경했던 풍경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예정보다 빨리 트래킹을 끝내고 좋은 호텔에서 푹 쉬기로 결정했다. 계획을 깨기로 결심했다.
기차역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요기를 하고, 클리안라리치에서 가장 커 보이는 호텔에 들어갔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호스트가 오지 않아 체크인이 늦어지고, 그새 또 배가 고파와서 일단 저녁을 먹으러 로비 층의 레스토랑부터 들러 피자를 시켰다. 혼자서 한 판 정도는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메뉴를 물으러 온 웨이터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게임과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은 또래 정도의 청년이었다. 마침 손님도 별로 없어서, <악마성 드라큘라>나 <FIFA> 같은 게임에 대해 한참 수다를 떨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신이 나서 개발에 참여했던 모바일 게임을 보여주니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가 담당한 부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 뒤로는 식사를 하는 내내 다른 손님에 비해 나를 특별히 신경 써주는 느낌이었다. 체크인 한 투숙객이 아닌 이상 알려주지 않는 와이파이 비번을 슬쩍 알려준 거랑 계산할 때 한 움큼 건네받은 사탕 정도가 그가 챙겨줄 수 있는 전부였지만, 진심 어린 호의가 참 기분 좋았다. 그 정도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저녁이었다.
다행히 식사 후 체크인도 잘 끝났고, 로비에 드라잉 룸이 있어서 진흙탕에 젖었던 등산화도 말려놓고, 따뜻한 방 안에서 느긋하게 샤워를 한 후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워 가벼운 마음으로 기대하던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목표한 대로 해내지 않아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던 하루. 계획을 깨길 참 잘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자다가 비 맞을 일도 없으니 걱정 없이 푹 잠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