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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천 Sep 20. 2021

16. 하이랜드

[100일 여행] 틴드럼 → 브릿지 오브 오키, 2015년 8월 27일

푹 쉬기로 한 어제의 결정이 맞았던 건지, 아니면 며칠 만에 드디어 하이킹에 익숙해진 건지.


오늘의 걸음은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하룻밤 편안하게 묵었던 클리안라리치(Cruanlarich)의 호텔을 떠나 기분 좋게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의 산길로 복귀했다. 내일도 오늘처럼 가벼운 발걸음이었으면.

먹구름이 껴 있었지만 다행히 비는 많이 내리지 않았다
틴드럼(Tyndrum)에 가까워지면서부터 풍경이 서서히 광활해지는 게 느껴졌다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는 틴드럼의 소나무 공원을 가로질러 이어졌다
공원 캠프장 리셉션에 들러 WHW 패스포트 도장을 받고 다시 길을 떠났다

틴드럼에 도착했을 때쯤, 드디어 고대하던 하이랜드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탁 트인 들판 한가운데 솟아 있는 하이랜드의 거산이 어떠한 기교도 부리지 않은, 순수한 거대함만으로 마음을 압도했다. 풍경에 취해 걸음을 몇 번이나 멈춰야 했다.

드디어, 하이랜드
돌산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조그마해 보였다
트래커는 익숙한지 심드렁한 눈빛으로 지나가던 소
산기슭에서는 산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브릿지 오브 오키(Bridge of Orchy)
하이랜드의 풍경에 둘러싸인 아담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브릿지 오브 오키의 호스텔은 특이하게도 기차역 승강장에 붙어 있었다. 한 고집하실 것 같은 할아버지와 상냥한 할머니 부부께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이곳의 주인이신 할머니께서는 예전에 부산에 와본 적이 있다고 하신다. 어떻게 스코틀랜드 사람이 부산에 다 와봤을까 싶어서 놀라웠다. 이곳 사람들이 날 볼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겠지.


돌이켜보니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를 걷기 시작하면서 한국인뿐만 아니라 아시아 사람을 한 번도 못 봤었다. 사람 자체가 별로 없는 길이라 하루에 트래커 대여섯 명 정도 마주치는 게 전부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온전히 홀로 보낼 수 있는 길.

브릿지 오브 오키의 브릿지가 이건가
검은 강물이 하염없이 흘러가는 곳이었다
가정집처럼 생활감이 묻어나서 아늑했던 로비 겸 식당
과자 값은 양심껏
궂은 날씨에 낚시하러 가는 게 맑은 날 일하러 가는 것보다 백배 낫지

짐을 풀고 잠시 근처를 산책하다가 저녁거리를 사서 숙소에 돌아왔다. 챙겨 온 멀티 어댑터가 영국 콘센트에 잘 안 맞아 헐겁다. 무게 때문에 빠지지 않도록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라디에이터 위에 충전기를 받쳐놓고 미러리스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시켜놓고 있다. 채 마르지 않은 등산화를 신고 걸어서 그런지 왼발 뒤꿈치 안쪽에 물집이 잡혀 쓰라리다.


아담한 도미토리 룸 안에는 나 혼자다. 오늘도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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