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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천 Sep 25. 2021

17. 무심하리만치 아름다웠던

[100일 여행] 브릿지 오브 오키→킨로클레벤, 2015년 8월 28일

하루 종일 글렌코(Glen Coe)의 산골짜기를 걸었던 날.


아침 일찍 브릿지 오브 오키(Bridge of Orchy)를 떠나 인버로난(Inveronan), 킹스하우스(Kingshouse)를 거쳐 해가 지고 나서야 킨로클레벤(Kinlochleven)에 도착했다. 뒤꿈치의 물집이 덧나면서 염증이 생겼나 보다. 한 걸음씩 디딜 때마다 깨진 유리조각을 맨발로 밟아나가는 것 같았다. 다리 근육은 비명을 지르고, 발바닥은 아픈 감각마저 없어져갔다.


그래도 이 길을 끝까지 걷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하루 종일 21마일을 걸었다.

숙소 할아버지께서 챙겨주신 크로와상을 먹으며 인버로난으로 향했다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는 글렌코 국립공원을 가로질러 이어졌다
이제 이 이정표만 봐도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안심 된다
무려 잉글랜드에서부터 이곳까지 걸어오셨다는 영국 아저씨
웬 해적 깃발일까
남은 방이 없어서 점심만 해결하고 나와야 했던 킹스하우스 호텔
악마의 계단(Devil's Staircase)에서 내려다본 하이랜드는 한 없이 거대했다
맑았던 것도 잠시, 곧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들판에서 홀로 한참을 서 있었다. 하이랜드의 광활한 풍경 속에서 스스로가 너무 작고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쓰러져버리면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았다. 아무리 열심히 발버둥 치며 살아도, 그래서 소위 말하는 대단한 사람이 되더라도 압도적인 대자연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한낱 미물일 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분이 참 괜찮았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너무 애쓰지 말고 그저 하루하루 소소하게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좋았다.


지독한 고통과 추위 속에서도, 글렌코는 무심하리만치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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