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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Apr 17. 2022

수퍼우먼은 울 공간이 필요하다

나를 잃지 않으며 돌보기

초기에 부모님과 함께 사는 일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감정을 숨긴다는 건 정말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네 몸부터 잘 챙겨야지" 했다. 그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었는데, 진심으로 내 몸을 잘 챙기라는 걱정 혹은 스스로 잘 돌봐야 아빠를 잘 돌볼 수 있다는 독려였다.


비록 나의 방이 있지만 나는 울 공간이 필요했다. 겉으로는 하루 종일 이어지는 연속된 노동들에 오히려 활기차 보였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계속 되묻고 있었다. 일하고 공부하고 글쓰고 집안일을 하고 누군가를 돌보면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일이 가능한가? 일주일에 한 번 받는 첼로 레슨은 그나마 나를 지키기 위해 나에게 내가 선물해주는 사교육이었다. 또 온라인 쓰기 모임을 꾸려 주기적으로 내 안에 쌓인 활자화할 감정들을 풀어내놓고 있었다. 그 시간 조각을 만드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건 사실이다.


남동생은 내게 "누나를 보면 수퍼우먼 같아" 했다. 그 수퍼우먼이 말한다. 수퍼우먼이 되는 건 자기만의 시공간을 잃어가는 일이라고. 스스로 원해서 수퍼우먼이 되는 여자는 없다고.


야무지게 먹고 야무지게 우는 자기돌봄의 시간.


아빠가 수술을 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시점, 나는 매우 지쳐있었다. 자기 돌봄의 시간이 간절히 필요했다. 퇴근 후 집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자고 왔다. 사실은 가출에 가까웠다. 다음날 일은 해야하니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 딱 12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숲 속 오두막에서 라면을 끓이고 감바스 알 아히요를 만들었다. 맥주 한 캔을 따고 좋아하는 드라마 한 편을 봤다. 다기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낮은 불륨으로 틀고 음악을 들으며 멍때렸다. 요가를 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나의 운동은 아빠의 산책에 동행하는 정도였다. 오로지 내 몸을 인식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요가를 하면서 울컥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날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나는 울 공간이 필요했음을, 자기 감정을 자유로이 흐르게 놔두는 것이 자기 돌봄의 기본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격주에 한 번은 밖에서 자고 오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생각할 틈이 반드시 필요한 나의 일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내게 시공간을 선물해줘야했다. 휴양림이 그런 고정적 장소로 제격이었다.


그 후에도 자기돌봄의 시공간, 즉 내가 울만한 때와 장소는 예기치 않게 발견되었다. 아빠가 항암주사를 맞는 2시간 동안 차에서 대기하는 시간도 그랬다. 주사를 맞는 동안 나는 외래 약국에 가서 2주치 약을 타오고, 병원 지하에서 필요한 의료용품을 사고, 각종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 소도시 같은 병원 지하 마트에서 내가 먹을 초콜릿 하나를 샀다. 차에 들어와 베어무는 순간 역시 울컥 하고 감정이 튀어나왔다. 혼자인 차 안에서 꺽꺽 울었다. 항암을 앞두고 두려운 마음이 나라고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보다 더 두려울 아빠 앞에서 차마 티내지 못하고 눌러온 울음이 한 번에 처럼 터져나왔다.


일찍 잠이 깬 새벽에도 그랬다. 멍하니 해가 뜨는 창 밖을 보면서 짙은 외로움을 느꼈다. 이 고립된 방 안에서 나는 잠을 자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아빠의 상태에 따라 안절부절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해왔던 시간이 복수라도 하듯 나를 울게 했다. 보호자로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 예민함까지는 이해할 생각이 없는 동생들에 대한 서운함도 같이 눈물로 흘러내렸다.


아빠를 돌보며 눈물에도 배액관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나에게 울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 아빠의 완치 후에도 이 업무 리스트는 지우지 않을 예정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의 불행은 안온한 일상에서도 이따금 찾아온다. 하지만 나는 울 줄 모르는 인간에 가까웠다. 이 악물고 버티는 무감한 인간에 가까웠다. 아빠를 돌보는 시간은 운다는 건 결국 자기 감정을 돌이보고 이를 회복할 방도를 찾아 나서는 자기 돌봄의 일종임을, 그리고 그 행위는 어떠한 인생에서도 꼭 필요한 일상임을 깨닫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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