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라는 씨줄, 본진이라는 날줄

그 두개를 엮어 자신만의 고유한 무대를 만드는 세상을 꿈꿔본다

by 이유진


올 초 육아휴직에 들어가기 전 이 대화를 나눴던 개발자 R이 곧 퇴사한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의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나는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졌다. 지난 주, 함께 일했던 디자이너 J, 개발자 R과 함께 1층 스타벅스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OO 가신대"


내게 R의 퇴사 소식을 전해줬던 J가, 그를 대신해서 내게 얘기했다.


나는 말했다.

아 그렇구나. 퇴사한다는 얘기 듣고 궁금하더라구요. 저 육아휴직 들어가기 전, 여기서 얘기했던 거 기억나세요? 자동화를 통해 좋아하시는 '요식업'에 적용하고 싶다는 얘기. 저는 그거 하러 가시는줄 알았어요.


R은 대답했다.

하하 기억나요. 생각은 계속 하고 있는데 아직 잘 모르겠더라구요. 이직이라는 선택이 그 고민을 약간 회피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이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 같기도 하고..


그의 말 중에서 '회피' 라는 단어가 가슴에 콕 박혔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송길영 작가의 <시대예보> 시리즈를 몇 번에 걸쳐서 읽었다. 그 중 2편에 해당하는 <호명사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책에서 그는 말한다. 생산성이 극대화되는 AI 시대에는, 나 자신이 깊어져야 한다고. 일상의 안정성이 흔들리는 시기일수록 모든 질문의 시작점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기에 선택지를 늘리려는 것이 아니라 '축적'을 추구하며 자신이 스스로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자신의 진정한 '본진'을 고르고, 본진에서의 깊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지속 가능한 과업을 찾는 시대가 올거라고.


여태까지 우리는 자신의 ’스킬셋‘을 증강하는 쪽으로 살아왔다. ‘개발' 을 할 줄 안다는 것, '디자인'을 할 줄 안다는 것, '데이터'를 볼 줄 안다는 것, '영상'을 찍고 편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직과 연봉상승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이 스킬셋을 무기 삼아 포탈이든, 소셜이든, 커머스든, 모빌리티든, 금융이든, 도메인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커리어 패스를 쌓아왔다. 그러나 오랜 시간동안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왔던 스킬셋은 AI 앞에서는 더 이상 큰 경쟁우위를 가지지 못하게 되버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느 조직에 ‘선발’ 되기 위해 누군가와 경쟁해야할 때의 관점이다. 바꿔서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내가 1,2개의 스킬만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무한히 많은 스킬을 손에 넣은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렇게 개인의 능력이 압도적으로 증강된 사회에서는, 자신이 진정으로 투신할 '본진' 나의 '도메인'을 결정하여 거기에만 매진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 아닌가? <시대예보> 시리즈는 이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린 여전히 불안하다. 수십년간 이렇게 살아왔는데 내 본진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 심지어 어렵게 찾았다 한들, '이게 과연 돈이 될까?' 하는 회의감이 엄습한다. 여태까지 우리 사회는 어느 한 쪽으로 돈과 사람이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 사회였기에, 갑자기 자기 안에서 답을 찾으라느니, 자기다움을 찾으라느니 하는 것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밖에 나가 뛰는 강요하는 것만큼 폭력적이게 느껴진다. 그랬기에 지금까지는 각자의 호오(好惡)와 상관 없이 최적화된 경로, 결과가 보장된 경로로 모든 자원과 사람이 쏠렸고 그 문턱을 넘어선 사람을 ‘성공’ 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배제된 선택지를 통해 아무리 물질적인 성공을 손에 넣었다 한들, 그것은 나의 본질적인 결핍을 해소하기 위한 엉뚱한 행위들을 통해 잃게 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각자의 본진을 발견하기 위해 함께 대화하고, 각자의 본진에서 하는 새로운 시작을 공유하고, 각자의 본진에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격려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태까지 다져왔던 '기술'이라는 씨줄과, 자신으로부터 발견한 '본진'이라는 날줄. 그 둘을 엮어 각자의 고유한 무대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그런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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