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증 환자의 치료 기록
증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느낀지는 벌써 약 9개월 차다. 이제 확실히 좋아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완벽하게 낫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까지는 왔다. 무기력감, 강박사고가 거의 없다시피 줄어들었다. 강박사고는 무시가 가능해졌다. 자살사고는 물론이며 지금은 오히려 이제부터라도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다. 약은 똑같이 먹고 있었는데, 대체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서 우울증이 호전되었을까.
얼마 전, 친구가 알려준 우울증 환자들의 카톡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패션 우울증이 아니고 진짜로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는 환자들이 모인 곳이다. 익명으로 진행되는 오픈톡방이 아니라 그런지 사람들이 모두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증상들을 털어놓으며 서로 공감하고 조언도 나누는 진또배기 모임인 것 같았다.
거기서 조용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깊은 수렁에 빠진 듯 푹 꺼지는 우울감과 무기력, 그리고 극단적으로 예민해진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서였다. 그런데 듣는 도중에 나는 순간 ‘어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는 내가 약간의 예민함 외에는 다른 증상에 있어서는 더 이상 공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 우울감이 심했더라, 언제 밖에도 못 나갈 정도로 무기력했더라. 이렇게 정말 놀라운 변화들을 체감한 것이다.
이젠 나의 일상 속 사사로운 고민은 그전의 아픔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가볍다. 최근에 했던 고민이라 해봤자 뒤늦게 찾기 시작한 진로계획이라든지, 카페에서 커피를 계산하며 마주친 성격 급한 아저씨 때문에 느꼈던 스트레스 정도였다. 신경증에 비한다면 정말 가소로운 고민이 틀림없다. 그 정도로 나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소소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드디어 찾았다. 남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할지 모를 정서적 안정감이 나에겐 얻어내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과 노력과 돈까지 들었다는 게 슬프긴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멀리 지나가버린 것들일 뿐이다.
끊임없는 강박사고로 인해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다는 감각조차 모르고 초조했던 내가 지금은 머릿속을 누가 싹 청소하고 간 것처럼 텅 빈 듯하다. 가만히 있어도 어딜 나가도 누굴 만나도 괴롭지가 않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별로 보지 않고 내가 짓고 싶은 표정을 짓는다. 싫은 사람은 되도록 보지 않는다. 과거에 날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또 애정결핍으로 사람을 가려 사귀지 않아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않는다. 그 끝에서는 매서운 현실 가운데 아파온 나를 탓하지도 않는다. 백수면 어떤가. 이제 나는 당당하고 자유롭다. 천만금을 얻은 듯하다.
요즘에야 내 안의 자아가 자라고 있는 걸 느낀다. 이전에 이해할 수 없던 사건이나 사람들의 심리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점점 완벽주의가 녹아내리고 강박과 불안, 우울이 씻겨 내려간다. 트림하듯 속이 다 시원하다. 이렇듯 좋아졌지만 당분간은 우울증 환자 모임에는 좀 더 남아 있을 생각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들어주고 조심스러운 조언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힘들고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고 있어서 지나치기가 힘들다. 그동안 내 주변에서 받았던 관심과 도움을 나누고 싶다. 우리의 짧은 인생과 만남에서 모두가 덜 아프길, 서로에게 치유와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