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의손 Sep 09. 2024

현실과 섬망 그 사이 어디쯤

잊으라 한다.

  병실 앞을 막 지나는데 환자 한분이 손짓을 하며 나를 불렀다. 환자의 기분을 살피며 다가가자 좀 더 가까이 오라 다시 손짓을 했다. 머릿속으로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백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이제는 말을 해야겠다"

 "어머니 무슨 말이요?"

환자는 참았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좀 큰 병원에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 그때 자신에게 "꺼져", "죽어' 이런 심한 말들을 한 사람이 여기서 만났다고 했다. 너무 놀랐지만 병원 직원이라 늘 참았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지 못해 의사 선생님에게 말을 한다고 했다. 

나는 의사가 아니지만 흰가운을 입으니 의사인 줄 아는 환자들이 많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은 높은 분이시니 간혹 나를 "원장님"이나 "과장님"이라고 부르며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도 있다.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 사회복지사라고 목이 터져라 말을 해도 그때뿐이라 환자들의 생각에 맞춰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이걸 사칭이라고 하면 의료법위반이나 공갈, 사기로 날 그냥 날 잡아가면 된다.

이브닝 근무를 하는 요양보호사는 여러 명이다. 누군지 물으니 이름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 저녁식사가 담긴  배식카가 들어왔다. 바쁘게 식판을 나르는 직원 중 한 명이 문 앞으로 지나갔다. 

 "저 사람은 아니고"

또 다른 직원이 식판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환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식판을 두고 직원이 사라지자 자 환자는 나를 보며 소곤대었다.

 "저 사람이라고..."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건 참 끔찍한 일이다. 무슨 이유가 명확하게 있으면 다행이지만 오늘의 경우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속상한 마음이 요동친다. 왜냐하면 이 환자는 섬망이 있기 때문이다.

섬망이 있는 환자는 없는 일도 사실로 말하고 행동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을 해줘도 자신에게는 현실이기 때문에 환청, 환시 같은 섬망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의사는 아니지만 경험상 섬망이 있는 환자에게 사실을 말해주고 이해시키는 것은 힘들다. 보호자도 직접 겪어보지 않고 환자나 다른 누군가를 통해 듣기만 한다면 믿지 않는다. 나 같아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기억 속의 내 어머니, 아버지, 내가 아는 그 사람은 그런 말과 행동을 허투루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이 환자는 정말 참고 참고 또 참았다가 나에게 큰 용기를 내서 말을 한 것이다. 자신에게 막말을 한 사람이 병원 직원이고 또 그 사람이 자신을 목욕시키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가져다준다. 좋건 싫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데 그 사람이 너무 싫은 것이다. 그리고 그 직원도 그 환자가 섬망이 있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안다.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안다. 그걸 알면서도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호스피스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알지만 모른척하고 또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퇴근시간이 되자 환자가 나를 다시 불렀다. 

"그냥 잊으세요"

환자는 나에게 했던 말을 잊으라고 했다. 자신이 참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지금 말하는 것도 우습다고 하면서. 

환자는 섬망이 있지만 마치 득도한 사람 같아 마음이 뭉클했다. 악쓰고 소리 지르고 발차기하는 환자들만 봐서 그런지 이런 환자들을 만나면 그냥 고맙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다.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나에게 잊으라 해 주니 말이다. 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는 아직 잊을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있다. 늘 그런 일들이 머릿속에서 튀어 올라 마음이 괴롭고 복잡할 때가 많다. 이 환자분의 마음속 평안이 오래도록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도 내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