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의손 Oct 26. 2024

나의 아보카도 3형제

중꺽마

 2023년 12월 아보카도 3개를 먹고 둥근 씨앗을 버리기 아까워 물꽂이를 했다. 밀가루 반죽을 뭉쳐놓은 듯 결이 있는 씨앗에 이쑤시개 3개를 꽂아 소주잔에 반쯤 담갔다. 해가 잘 들어오는 부엌 창가에서 햇볕을 담뿍 받고 딱딱한 씨앗은 결을 따라 갈라졌다. 그리고 실처럼 하얗고 작은 뿌리를 내렸다. 하얀 뿌리가 곱게 내려앉은 3개의 소주잔을 보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났다. 하얗던 뿌리는 자라며 짙은 색으로 바뀌며 굵어지고 단단해졌다. 단단하던 씨앗은 더 벌어지면서 위에는 줄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출근과 집안일을 반복하던 나의 무료한 일상이 조금은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2024년 새해가 되었다. 1월 중순이 되자 줄기 끝에 초록 순이 보였다. 뿌리도 제법 자란 탓에 입구가 큰 유리병으로 옮겨 주었다. 나는 1호, 2호, 3호라고 뿌리가 나온 순서대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첫 번째로 뿌리를 내린 1호 아보카도가 제일 먼저 초록 순을 나에게 선물했다. 곧 잎이 나올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작고 대견한 그 씨앗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싱크대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부엌칼을 들었다. 갈라진 작은 씨앗 일부를 잘라내려 칼을 든 손에 힘을 주었지만 딱딱한 씨앗은 칼이 들어가지 않았다. 1호를 쥔 두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순간 내 힘을 이기지 못한 씨앗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탁구공인 듯 바닥을 몇 번 튕기고 나서야 둔탁한 소리는 멈췄다. 칼을 쥐고 있던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쳐다볼 수가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1호는 떨어진 충격으로 씨앗이 반으로 갈리면서 줄기도 세로로 찢어지고 말았다. 자라던 하얀 뿌리도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줄기가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니라서 이쑤시개를 대고 반창고로 1호의 둥근 몸을 감았다. 마치 잘 자라고 있던 아이를 내 손으로 죽인 것 같아 쳐다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제일 먼저 나에게 와 준 아보카도 1호는 뿌리는 자라고 있었지만, 성장판에 손상을 입은 듯 줄기는 말라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지 못하고 물속에 담긴 씨앗과 뿌리는 악취를 풍기며 썩기 시작했다. 며칠 뒤 1호는 부엌 창가에서 사라졌다. 내 욕심으로 한 생명을 죽였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오던 아들이 나를 이상한 듯 쳐다봤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키우던 식물이 죽은 것이 처음이 아니지만, 죄책감은 크게 느껴졌다.

 1호를 눈물로 보내고 나서 2호와 3호는 빠르지 않지만 매일 매일 조금씩 자랐다. 뿌리도 어느새 모양을 갖추어 단단해졌고 잔뿌리까지 내리고 있었다. 잘 자라던 2호와 3호의 성장은 뜨거운 여름을 지나며 정체기를 맞고 있었다. 매일 물을 갈아주고 곰팡이가 슬지 않게 뿌리도 씻어주었지만, 여전히 잎은 아래로 향해 있었다. 아무래도 흙으로 옮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물꽂이는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8월 첫 주 일요일 안방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화분에 3호를 심었다. 흙 속에 담긴 3호는 베란다에서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작은 줄기를 올리며 빠르게 적응해 갔지만 2호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주축이 되는 제일 굵은 뿌리 일부가 물속에서 썩고 있었다. 가위로 뿌리를 정리하고 깨끗이 씻어 그늘진 곳에서 조금 더 살펴보기로 했다. 며칠이 지나자 2호를 담가놓은 유리병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칫솔로 동그란 씨앗과 뿌리를 씻어주고 썩은 뿌리는 다시 잘라 주었다. 더 늦으면 흙 맛을 보기도 전에 썩어버릴 것 같아 8월 마지막 주 늦은 저녁 흙 속에 뿌리를 묻었다. 죽기 전에 흙에라도 묻혀보라는 마음이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며 가끔 물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뿌리를 잘라 흙 속에서 하얀 뿌리부터 내리게 하고 싶었지만, 뿌리가 거의 썩어 줄기까지 썩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다.

 좁은 베란다 천정에 붙은 건조대에서 빨래를 걷다가 옷 하나가 화분 위로 떨어졌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빨래가 떨어진 곳이 마침 2호의 머리 위였다. 자세히 보니 잎 사이로 올라오는 줄기 끝 생장점이 빨래에 눌려 으깨졌다. 걱정되었지만 지켜볼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줄기 끝이 검게 말라 있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2호를 1호처럼 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2호는 내 마음도 모르고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9월이 왔지만, 여전히 더운 날이 계속되었다. 3호는 더위에 자라지 못한 것을 보상하듯 다른 식물들 옆에서 기죽지 않고 16개의 크고 멋진 잎을 자랑하며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다. 비가 한차례 오고 나서야 9월의 공기는 조금 시원해졌다. 2호는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아래로 쳐진 잎과 만지면 먼지가 될 것처럼 검게 변한 줄기 끝을 보고 있으려니 잎조차 만지기 망설여졌다. 화분 속 흙의 물기를 가늠해 조금씩 물만 줄 뿐이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10월이 되었다.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나고 있지만 2호는 여전히 멈춘 상태였다. 흙 속의 뿌리가 궁금해 몇 번이나 흙을 파보려 했지만, 식물들도 극한의 상태에서는 살려고 더 열심히 활성화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물도 최소한으로 주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2호를 보며 물조차 맘껏 먹지 못 하게 한 것도 내 욕심이었던 것 같아 다시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날도 쳐진 잎을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나의 시선이 검게 변했던 줄기 끝에서 멈췄다. 검었던 줄기 끝은 온데간데없고 연둣빛 무언가가 보였다. 휴대폰을 가져와 사진을 찍어 확대해 보았다. 작은 순이 자라고 있었다. 주책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또 아들이 볼까 싶어 안방 문부터 닫았다. 내가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는 동안 2호는 최선을 다해 살아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4개의 잎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연둣빛 순은 더 자라 새잎을 만들어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24년 뜨거웠던 2호의 여름은 다행스럽게 나의 바람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2호와 3호가 시원하게 흔들리고 있다. 마치 좁은 베란다에서 온몸을 흔들며 뜨거운 여름을 보낸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