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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손 Sep 08. 2023

산 사람의 생일, 죽은 사람의 제사

생일인데 병원입니다.

나와 22살 차이가 나는 여자 사람 할머니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 숱 많고 검은 머리카락은 세월 따라 백발이 되었고 매일 숙제처럼 한 움큼씩 약도 드십니다.

집청소도 매일 한다는데 바닥엔 흙도 있고 청소한 흔적을 찾기가 더 힘들 때도 있습니다.

냉장고엔 음식들이 꽉 차 뭐가 어디 들었는지 알 수도 없고 유통기한이 언제인지도 모를 고기며, 생선이며 해마다 들여다봐도 똑같은 자리에 있기도 하고 김치냉장고엔 썩고 얼어서 못 먹는 음식들로 들어차 있어 집안에 들어서면 냉장고부터 열어 봅니다.

할아버지와 싸우며 아들집을 오가다가 작년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독거노인으로 살아간 지 9개월입니다.

젊었을 때는 농사일도 하고 객지로 나가 돈을 벌어 자식들 공부도 시켰다는데 그 자식들이 누구 하나 번듯하게 자라 부모 고생한 보람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 흔한 "사"자 가진 직업이 없습니다. 그냥 고만 고만 하게 앞가림하고 결혼해서 자식들 겨우 건사할 정도랍니다.

도시라고 독거노인들이 없진 않지만 시골엔 독거노인들이 많습니다. 

동네에 부부가 사는 집을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니 혼자 산다고 이상할 것도 없고 나라에서 비상벨도 달아주고 주 1회 도우미분이 오셔서 살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와주고 하신답니다. 

그리고 연세가 있어 농사일도 못하고 경제활동도 하지 않으시다가 남편이 갑자기 죽고 나서 동네이장님과 어르신들이 혼자 있으면 눈물바람만 하고 있다고 반강제로 노인일자리사업에 신청을 해서 억지로 일도 하고 있습니다.

돈 30만 원 남짓되는 거 없어도 되니 일 안 했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미망인이 되어 그런 마음을 동네분들은 몰라준다며 짜증도 내지만 동네사람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키기는 싫어 노인일자리 일을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대략 3일 정도 집 앞 회관에 가서 청소하고 몇 발작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만의 시간을 보냅니다.

작년겨울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난청이 있어 TV소리도 커야 했고 덩달아 목소리도 크고 폐가 좋지 않아 기침도 수시로 해대서 늘 화가 나고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조용히 해도 되는 말을 고함지르듯 하는 할아버지와 매일매일 싸웠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서 조용한 집에서 지내던 할머니가 며칠 전부터 목소리가 이상하고 기운이 없어 노인일자리 일도 며칠 쉬고 집에서 지내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응급벨을 눌러 119를 불렀다고 합니다. 간단한 감기라고 생각했는데 미열이 있어  30분 거리 종합병원으로 이동했고 열이 있으니 혹시나 해서 코로나 검사를 했는데 양성이 나왔고 격리되어서 자식들과 만나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사실 이 할머니는 오늘이 생신이십니다. 그리고 시아버지와 시할아버지의 제삿날이기도 합니다. 시집오고 나서 누구 하나 본인의 생일을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식들이 장성하고 나서야 제삿날 아침에 미역국을 끓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생일날 아침에 며느리가 미역국을 끓여 준다고 합니다. 누구 잘못도 아닌데 결혼해서 산 세월의 반이상의 생일에 미역국도 못 먹고 생일을 잊은 채 서운함만 마음에 담고 사셨다고 합니다.

조금 아플 때 참지 않고 빨리 병원에 갔더라면 어쩌면 생일은 아들, 손자, 며느리와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도 이 상황이 웃기는지 웃습니다. 생일인데 제사이고 제사인데 생일당사자는 면회도 되지 않는 병원이라니.

제사를 지내는 큰아들집에는 아침 일찍 주부인 둘째 딸이 새벽같이 가서 우렁각시처럼 음식만 해놓고 돌아갔고 출근한 큰며느리는 출근을 했다가 점심때 집으로 와 음식장만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회사를 다니는 큰딸은 생일인 산사람은 병원에 있는데 죽은 사람 제사는 필요 없다며 안 간다고 할머니에게 전화만 했다고 합니다. 생일이라고 둘째 딸은 백화점에 가서 신발도 고민해서 샀다는데 일주일 후에야 드릴 수 있어서 아쉬워할 것 같습니다. 

할머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 폐렴까지 있어서 어쩌면 일주일을 넘겨 병원생활을 해야 할지도 몰라 걱정도 되실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얼른 나아서 집으로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을 하시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백발의 할머니는 저의 엄마입니다. 생일인 산사람은 병원에 있는데 죽은 사람 제사는 필요 없다고 안 간다던 큰딸이 저랍니다. 오늘일은 두고두고 우리 가족들이 회자하며 웃을 것 같아요. 너무 당황스럽고 어이없어서요.

엄마가 입원한 사이 시골에 가서 냉장고 청소도 하고 집안 소독도 하고 올 생각이에요. 

작년 겨울 아버지가 직접 119를 불러 타고 병원에 가셨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는데 엄마도 119를 타고 병원에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19살에 시집와 시집살이하며 시할아버지 제사에 밀리고 시아버지 제사에 또 밀리고 자식이 결혼해서 며느리가 생기고 나서야 편하게 미역국 한 그릇 드셨는데 이번 생일은 병원입니다. 내년 생일은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 즐거운 생일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을 담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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