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de Roland Garros
늦은 봄의 여운이 아직 살랑이는 파리 16구, 올해 두 번째 그랜드슬램이 열리는 붉은 클레이 코트를 찾았다.
사실 지난겨울 1월 말에서 2월 초에 열렸던 일반 티켓 등록 기간을 놓쳐서 엄청 시무룩했었는데, 올봄 라스트 티켓 기간에 운이 좋게도 그라운드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이미 항공편을 다 예약해 놨던 지라 일단 경기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학창 시절 여름방학마다 함께한 윔블던은 어마무시하긴 하지만 줄을 서면 언젠간 경기장에 들어설 수 있었지만 롤랑가로스는 정해진 기간 등록을 마치고 랜덤투표에서 살아남아야 이 흥미진진한 모험에 뛰어 뜰 수 있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품고 도착한 경기장, 메트로에서 나서자마자 빨강과 주황 그리고 갈색 그 사이 어딘가 따사로운 테라코타 색상의 물결로 세상이 가득했다. 비를 살짝 머금은 구름덕에 공기는 쌀쌀했지만 사람들이 향하는 발걸음은 감출 수 없는 기대로 가득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나달의 청동 동상. 지난주엔 이곳에서 클레이의 황제, 롤랑가로스 통산 14승에 빛나는 라파엘 나달의 은퇴식이 있었다. 경기장 곳곳에 놓인 나달의 흔적들을 보고 있으니 영광의 빅포와 그를 사랑하는 팬들이 함께 있던 그 무대에 내가 서있다는 실감이 났다.
경기장은 정제되고 세련된 공간감이 돋보였다. 주요 쇼 코트인 필립 샤트리에(Philippe Chatrier), 쉬잔 랑글렌(Suzanne Lenglen), 시몬 마티외(Simonne Mathieu)는 최근 리노베이션과 지붕 설치를 통해 더욱 현대적이고 모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야외의 14개 외부 코트는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어 자유롭게 원하는 경기를 찾아갈 수 있다. 오전엔 주니어 부문, 휠체어 테니스 경기, 그리고 전설의 선수들이 복식으로 출전하는 ‘레전드 경기’까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라운드 티켓으로는 메인 코트인 필립 샤트리에까진 입장할 수는 없었지만,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실시간으로 경기를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윔블던에 ‘머레이 힐(Murray Hill)’이 있다면, 롤랑가로스엔 무스케티어 광장(The Place des Mousquetaires)이 있다! 프랑스 테니스의 전설인 장 보로트라, 자크 브륄롱, 앙리 코셰, 르네 라코스트 네 사람을 기리는 이 광장에는 초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외부 좌석이나 바닥에 자유롭게 앉아 소풍처럼 경기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경기장에 왔다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경기를 직관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다. 화면을 뚫고 나온 듯한 선수들의 강력한 서브,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 듯한 랠리 그 몰입감과 함께 응원하다 보면 한두 시간쯤은 금세 지나가 버린다. 경기를 보고 있으면 엄청난 체력 소모도 힘들겠지만, 무엇보다 어느 순간에도 놓지 말아야 하는 집중력,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코치의 지도 없이 스스로 다독이며 견뎌내야 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울 까.... 현장에서는 실시간으로 선수들의 표정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어 그 긴장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히 휠체어 테니스 선수들이 수없이 구르고 넘어지며 자신의 한계를 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박수와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선수들뿐 아니라 뜨거운 열정을 지닌 수많은 프로들을 만날 수 있다. 수기로 대진표나 경기 정보를 기록하는 공식기록원들의 노고, 많은 이들의 눈이 되어줄 촬영팀들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경기 진행을 책임지는 심판 외에 이곳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볼보이와 볼걸(Ramasseurs de balles)들이 어디에서나 경기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 내 12~16세 청소년 중에서 체력, 집중력, 민첩성 등의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선발된다고 한다. 수천 명의 지원자 중 단 수백 명만이 본선에 초청되며, 훈련과 예선을 거쳐 경기장에 배치된다. 단순히 공을 주고받는 보조 역할이 아니라, 정말 경기 중 선수들과의 호흡을 통해 경기의 흐름을 만들어간다. 때론 무릎을 꿇은 런지 자세, 허리를 낮춘 채 장시간 햇볕 아래에서 대기하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들이 리듬감 있게 움직이며 전문적으로 운용해 나가는 모습이 참 멋졌다.
반나절만 있으려고 했는데 하루 종일 경기만 봤다. 프랑스 남부의 자갈 위에 벽돌가루를 뿌린 붉은 클레이 코트의 바람을 잔뜩 맞으며, 이곳과 닮은 끈기와 체력으로 하루를 꽉 채워 보냈다. 선물같이 결승전 연습을 하는 사바렌카도 보고, 마치 느리고 깊이 있는 예술적인 테니스 작품을 관람한 기분이다. 다음에는 한국 선수들 경기를 응원해 보고 싶다는 바람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 알카라스 경기도 다시 보러 오고싶다는 작은 소망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