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cta Maria Church_의정부 주교좌 성당
가끔 현지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함께하곤 한다. 스리랑카 경제위기, 진행 중인 사업 얘기 등 머리 아픈 이야기를 지나면 언제나 “스리랑카 어디까지 가봤니?” 좌담이 이어진다. 후보지로 자신들의 고향이 하나씩 등장하고 마지막엔 빠지지 않고 꼭 캔디(Kandy)가 언급된다. 지난달에 이어 아직도 위시리스트에 남겨두었다고 하면 “그렇다면 아직 진정한 스리랑카를 만나지 못했구먼..” 이란 아쉬움이 3초 정도 얼굴에 스쳐 지나간다. 무엇이 그토록 특별하다는 걸까?
캔디는 2000년 동안 이어온 싱할라 역사의 마지막 수도인만큼 도시 자체가 역사이자 민족의 상징과도 같다. 기원전 아누다라푸라왕국이 남인도의 침략으로 천도를 거듭하다 폴로나루아를 거쳐 캔디에 정착하는데 이곳이 바로 민족의 최종 목적지였다. 산 위의 고요하고 단단한 땅, 스리랑카 문화유산 기행의 마지막 퍼즐인 이곳에 마침내 도착했다. 싱할라 민족의 혼이라 할 수 있는 문화유산, 캔디안 민속공연 등 볼거리가 한가득이지만...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언제나처럼 희미하게 반짝이는 신앙의 발자취였다.
신성 캔디왕국이 기록된 살아있는 박물관과 성터 그리고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치사를 지나 도착한 이곳은 깊은 산속 비밀의 정원처럼 가리어진 Sancta Maria Church다. 굽이굽이 비탈진산길이라 요 며칠 폭우로 약해진 지반으로 가는 길부터 걱정이었다. 안 좋은 컨디션에 고산지대라 쌀쌀한 날씨까지.... 다행히 빗줄기가 천천히 잦아들고 동행들의 배려로 어렵고 어렵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언제나 감사할 따름이다)
성당은 시끌벅적한 도심을 벗어나 산자락 외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 길 끝에 무언가가 나오긴 한단 말이지?’라는 생각이 들 때쯤 모습을 드러낸다. 회색 안개가 내려앉은 성당 앞마당엔 반듯한 조경위로 순백의 성모자상이 보인다. 빗방울을 머금어 수채화 같은 작은 정원엔 초록 잎사귀들이 일렁인다. 그리고 싱그러운 풀내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거세게 내리는 비를 지나 잠시잠깐 이 청명함에 쉬어 갈 수 있음에 반짝 기운이 났다.
이 높은 언덕에 성당에 봉헌된 건 1939년으로 3명의 아일랜드 구속주회 (Redemptorists) 수도회 사제분 덕분이었다. 신부님들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성화 사본을 이곳에 모시고 성전을 봉헌했다. 현재 성화 원화는 로마에 있는 성 알퐁소 구속주회 성당 중앙 제대에 모셔져 있는데 이곳도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성화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나무 제단과 잘 어우러진다. 잠깐 성전 내부만 둘러보고 성모님께 인사만 드리려고 했는데 성당 관계자분이 먼 곳에서 온 손님을 환대하며 성전 불을 밝혀주셨다. 덕분에 당신께 간구하는 많은 이들을 돌보아주셨던 아름다운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모습을 더 가까이 뵐 수 있었다.
성화를 자세히 보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여러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 두 천사들이 양 옆에서 주님의 수난을 예견하고 있음에도, 머리 위에 별처럼 어두운 밤 보호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아기 예수님과 맞잡은 손으로 우리에게 그 모든 은총을 중계해 주심이 새로이 다가왔다. 이렇게 찬찬히 그 의미를 깨달아가며 묵상하듯 그림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감기몸살로 몸은 아프고 여건상 오는 것을 포기하려 했지만 길 위에서의 간절한 청에 사랑으로 응답해 주신 그분께 오래 눈 맞춤을 드렸다.
가끔 이렇게 알 수 없는 이끌림의 신비를 체험하는 공간들이 있다. 주교좌 의정부 성당이 내겐 그랬다. 역시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주보로 모시고 있는 주교좌성당은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경기 북부에 있는 공소를 포함하여 많은 성당들을 분가한 어머니와도 같았다. 특히 1952년 완공된 옛 사적지 성당은 '경기도 문화재 제99호'로도 지정되어 있는데 어디선가 오르간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포근한 성전은 어쩐지 스리랑카의 어머니 성당과 많이 닮아 있다. 서울대교구 최초로 레지오 마리에가 창설되고, 의정부 성모병원과 유치원 등 지역사회를 돌보았다니 어머니의 그 깊고 넓은 마음을 따르고자 하는 그 사랑이 느껴진다.
사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단풍이 지던 가을의 의정부 성당은 유난히 고즈넉했다. 워낙 오래된 문이어서였을까? 신발을 벗고 들어서려던 찰나 삐그덕 문이 천천히 열리고 나는 마치 초대받은 사람처럼 성전 안에 들어섰다. 그저 우연인지 몰라도 쏟아지듯 들어오는 빛의 성전에서 신비에 싸인 그날 오래도록 앉아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눈 맞춤을 했다. 나를 보호하고 이끄시는 힘을 가까이 느낀다는 건 놀라운 기적이자 위로이다. "잘하는지는 몰라도 바로 나아가고 있구나..." 매일의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순 없어도 적어도 내가 같은 길 위에 있음을 확인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미사시간까지 맞출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렇게 정성스레 가꾸어진 성당에 머무를 수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성모님이 언제나 또 영원히 내 곁에 계심을 새롭게 느낀다. 신자들이 있으면 있는 대로 혹은 이렇게 비워진 시간에도 다른 느낌인데 때론 새롭게 공간을 해석하고 더 찬찬히 그리고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값지기도 하다. 사실 이 먼 산길을 따라 가로등도 없이 미사를 다닐 신자들이 얼마나 뜨거운 신앙심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