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겐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존재가 있다. 노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내어 놓아도 자연스러운 상태. 이를테면 무의식 속 어린 자아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게 하는 존재의 양식이랄까? 나에게도 그런 유일무이한 사람이 있다. 시인이자, 신앙인이자 나의 보호자인 외할머니. 아마 태어나서 가장 먼저 애착을 형성한 존재여서 일 것이다. 유년시절 부모님은 바쁜 직장생활에서도 나를 최우선으로 챙겨주셨지만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나의 기억저장고에는 할머니와의 순간들이 가득하다. 품으로 파고들면 나던 포근한 살냄새, 무릎을 베고 누워있으면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겨주던 온기, 학교 갈 때면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던 그 다정한 형체.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던 순간들이었다. 나에겐 그 존재 자체가 사랑이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받기만 했지만 어쩌면 사랑을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모든 순간 함께 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사랑받기 위해 존재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매 순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주고 때론 작은 행동에도 감탄해 주는 목소리로 세상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신여성인 할머니와는 그렇게 청소년기에도, 성인이 되어서도 서로의 삶의 일부분을 교환 일기처럼 나눠왔다. 때론 바쁜 일상 속에 소홀해질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슬프거나 행복한 순간에는 함께였다. 그리고 언제나 할머니의 기도엔 나의 이름이 담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 내겠노라고 다짐해 왔다.
애석하게도 시간은 흐르고 곁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의 총량이 유한함을 그리고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매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만들어 내는 변화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오래 당뇨를 앓으시던 할머니의 시력은 점차 나빠져 이제 눈앞에 나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럴 땐 혹여나 놀라지 않게 가만히 머리를 가슴에 대고 폭 안겨 보는데, 그럼 할머니는 "내 강아지 왔네..." 라며 아이 같은 기쁨으로 나를 맞는다. 그러면 나의 심연엔 바다 같은 눈물이 고인다. 몸이 약하던 나를 업고 항상 대학병원에 다니던 어린 시절처럼, 이젠 깃털처럼 가벼워진 할머니를 업고 문 밖을 나서기도 한다. 나에게 헤아릴 수 없이 커다란 이 존재는 아직 그대로인데 조금씩 그 일부가 세상에서 소멸해 가는 듯한 상실감과 두려움이 나를 이불처럼 덮는다.
흐르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아침의 피아노 -72p
상실은 불현듯 예고도 없이 찾아오기도 한다. 사실 일을 하면서 스승을 만나기는 어려운 법인데 어느 날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동료이자 고목처럼 청청했던 교수님의 부고를 들었다. 해외로 나오기 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던 게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일까 한동안 열이 나는 것처럼 아득해지고, 이따금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아마 직접 찾아뵙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더해져서였을 것이다. 나에겐 은인이자 소신대로 곧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셨던 분이기에 좀처럼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흘러간 시간을 추억하고 그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 애도하는 것뿐이었다.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도록 놓아주고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은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가오는 것들을 무심하고 담담하게 맞이하자.
존재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마치 영원할 것 같지만 그저 오늘도 시간의 통로를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저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기도 하고 그 관계들 속에서 기억된다. 나의 할머니가 전해주었던 것처럼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말아야겠다. 어쩌면 우리에게 삶의 유한함이 주는 선물은 주어진 생을 감사한 마음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이 무한하게 주어진다면 그 소중함은 그저 당연함이 될지도 모른다. 나의 생애는 모든 것들이 충만하다. 사랑의 주체로서 가득한 축복과 자유를 자주 꺼내 보아야겠다. 덧없음이 가린 생의 찬란함을 기억하며.
물고기 눈에는 눈물- 봄이 가면 물고기도 운다. 젖은 눈을 눈물로 또 적시며 슬퍼한다. 하지만 먼 하늘을 보면 가는 봄을 너무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오고 가고 또 가고 다가오는 것들- 생은 덧없어 가지만 또 도래한다. 소멸은 안타깝지만 덧없음이 없으면 저 빛나는 생의 찬란함 또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니 물고기야 울지 말자. 그래도 울고 싶으면 도래하는 생의 찬란함을 환대하는 기쁨으로 울자꾸나.
아침의 피아노 -292p
비 오는 날 세상은 깊은 사색에 젖는다. 그럴 때 나는 세상이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는 지도 안다.
아침의 피아노 -13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