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두려움
폭우처럼 쏟아지는 업무를 감당해 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어진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남아있기 때문에 바로 잠들 수는 없고 일단 이럴 땐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나의 지정 자리로 가서 몸을 뉘어야 한다.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무념무상의 상태를 만들면 조금씩 평정심을 찾아갈 수 있다. 그래야 뇌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엉켜 버린 실타래를 풀어 찬찬히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편집하고 수식값을 넣는 것이다.
나는 나의 공간에선 대체로 누워있는 편이다. 김영하 작가님의 말을 빌리자면 ‘함부로 앉아 있지 않는다". 물론 작가님은 자신의 능력을 100% 쓰면 안 되고 어떠한 일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능력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의미였지만, 나는 대게 밖에서 100%를 쓰기 위해 미리 에너지를 풀충전 해두는 느낌이다. 눈을 감고 있지만 자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명상을 하는 것도 아닌 그저 멍을 때리고 있는 상태이다. 늦은 오후 시시각각 하늘 빛깔이 변해가는 것을 몇 시간이고 관찰하고 있노라면 집안의 시공간이 변화하는 찰나를 만나기도 한다. 그냥 그런 선물 같은 순간들을 좋아한다.
말하자면, 게으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다. 물러났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게으름의 즐거움, 피에르 쌍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어쩌면 나에게 가장 편안한 상태이다. 하지만 '생산성'측면에서 본다면 이건 분명히 낭비일 수밖에 없다. "이제 그만 게으름 피우고 일어나라..!" 이성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정도 시간이면 밖에 나가서 운동을 하고, 논문 한 편을 읽었겠다... 결국 시간 자원에 대한 기회비용을 따지며 죄책감으로 귀결될 뿐이다. 나의 주간 목표에는 또 '낭비 시간 줄이기'가 최우선 과제로 올라올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연결되는 이 시간은 어쩌면 피난처와도 같다. 고요와 평화로움이 공존하는 이 시간을 그냥 있는 그대로 향유하고 게으름뱅이로 살면 안 되는 걸까?
자발적으로 나를 내버려 둔 시간이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것 만도 아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공상하고, 궁리하고 사유하기 때문이다. 쓸데없을지 모르겠지만 우연히 들렀던 카페 좌석의 배치, 조명, 커피의 맛과 향 등을 회귀하며 다음에 어느 자리에서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해 본다거나,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보고 떠올랐던 기억을 장작 삼아 글감노트에 갈무리 전 머릿속으로 이야기들을 발화시켜 보기도 한다. 그중 단연 가장 행복한 일은, 66일 챌린지가 성공하면 향하게 될 12월의 파리를 마음껏 상상하는 일이다.
만성적인 게으름과의 원활한 협상을 위해 새벽기상 후 글쓰기, 근력운동 그리고 프랑스어 공부를 매일 달성해 내면 나에게 파리여행이라는 선물을 주기로 했다. 관리자적 자아에게 '성장'을 위해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지점이었다. 다만 그 외의 시간에서 더 이상 게으르다는 프레임에 나를 가두지 않기로 했다. 사실 몸과 마음에 쉬어 갈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은 어쩌면 살기 위해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너무 매정하게 나를 검열하고 통제하기보다 좀 더 자유권을 넘겨주는 것이다. 적어도 휴식하는 것에 조차 자책과 자격을 지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기 때문에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쉼표를 매겨 가며 연주해야만 한다.
우리 안에는 늘 새로워지려는, 다시 생기를 얻으려는 본능이 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자기 안에서 깨우려는 의지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고 있으며, 삶에 매몰되어 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치유하고 온전해지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류시화
게으름의 시간은 내면을 흔들림을 다독이고 자정작용을 일으키는 고마운 시간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빈둥대는 나를 발견하면 "내 안에 청소할 게 많았구나. 필터를 더 자주 갈아줘야지.."라고 말해줘야겠다. 하지만 이 생각을 하면서도 혹여나 내 안에 나태함이 만연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MBTI의 T와 F가 50대 50인 사람이 가진 슬픈 고뇌랄까. 이럴 땐 잠시 비판적 사고를 접어두고 자기 긍정 그리고 신뢰에 조금 더 힘을 불어넣어 줘야만 한다. 일단 게으름이 주는 휴식의 바이브를 즐겨보자. 그다음 자아의 회복을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갈 단단한 힘을 스스로 느껴보는 것이다. 결국 다시 한번 나를 믿어보는 것이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류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