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le Sep 28. 2024

자라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

도토리가 가상 화폐이던 시절이 있었다. 라떼는 그랬다. 엄마찬스로 도토리 50개를 구매하면 음악도 사서 듣고 작은 미니룸에 가구도 들이며 작은 네모상자에 나의 언어와 관심사를 가득 채워나갔다. 나는 항상 새벽에 싸이하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고국에 있는 친구들과 연결될 수 있는 소중한 창구였기에 더욱 애틋하기도 했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때 그 시절 감성은 내 안에 남아있는데 세월은 흐르고 새삼 "내가 옛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문득 내가 나이 들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나이 든다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내 안에 불쑥 솓아 오르던 불같은 에너지 그리고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잠재우기 바빴던 시절과는 다르게, 이제 제법 어려운 감정들도 다뤄내고 내적 소용돌이에 중심을 잡을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침내 나도 철이 드는 건가..?' 싶을 땐 이 안정감이 반가운 동시에 세상의 흐름 속에 무뎌져 가는 것만 같은 내적 불편함이 함께 자리 잡는다. 아마 그 역동성과 예민함이 나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라고 믿고 있어서 일 것이다. 이미 철이 들기에 한참 늦은 지금도 나의 일부는 아직 어린아이이고 싶은 것이다.


나는 유난히도 관심사에만 깊게 몰입하는 성향이 있다. 관심이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무한한 정성과 시간을 쏟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는 무심하기에 이를데 없다. 어린 시절엔 이걸 '선택과 집중'이라고 생각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게 뭐가 문제인가. 하지만 실상은 관심이 없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있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상처를 주기도 그리고 공존할 수 있는 거리를 내어 주지 못한다.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보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고, 관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으면 나무가 바로 옆에 있어도 있는 줄 모른다. 어떤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과 같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105p,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조금 더 솔직하자면, 때론 관심을 가지지 않음을 무기로 나를 지키고자 했다. 예컨대 눈뜨고 보기가 힘든 뉴스들이 세상을 도배할 때는 아예 포털 사이트에 시선을 두지 않는 다던지 하는 것이다. 특히 내가 더 이상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단절감을 느꼈을 때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칼보다 더 날이 선 방패를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린 날의 나는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아직 철들지 않은 어린아이가 필요하지 않은 가 싶다. 스스로에게 미성숙한 자아를 합리화할 수 있는 이유 하나쯤은 필요하니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결국 이 어린아이를 조금씩 비워내는 일일 것이다. 나의 일부를 덜어내는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로 누군가를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품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아직 마음이 수용하질 못한다. 말로는 자신을 버렸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과 자신에게만 관대한 잣대를 역설하는 어느 감독의 '내 안에 무언가...'를 들으며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제대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 그 아이의 이야기에 휘둘리는 것이 아닌 내려놓는 과정이라는 것을.


오래된 나무는 대부분 속이 비어있다.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나무 역시 나이가 들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상처에 대한 재생력도 줄어든다. 비바람에 가지가 부러지거나 병충해로 수피가 다치면 상처 부위에 물이 흘러들어 조금씩 썩게 된다. 그로 인해 나무의 무게를 견고히 받치고 있는 중심부는 조금씩 부식되고, 중심 목질부가 사라진 자리에는 빈 공간만 남는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나무가 쓰러지는 것은 아니다. 수백 년을 지탱해 온 뿌리의 힘으로 굳건히 버티면서 나무는 상처가 남긴 빈 공간에 작은 들짐승과 곤충들을 품는다. 나무의 텅 빈 속이 한겨울 매서운 비바람에 지친 동물들의 은신처로 변모하는 것이다.

-221p,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그릇이 비어있어야 쓸모가 있듯, 비어 있음으로 유용하다


나도 이제 제법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표정, 태도 그리고 자세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나이테를 가지게 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이고 내가 가진 무게에 책임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자신을 비우고 작은 생명들을 품는 나무처럼 내가 가진 것을 덜어내는 것이다. 그동안 중력의 무게만큼 내 안에 고착된 생각에서 벗어나, 부단한 변화의 과정을 통해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야 한다. 위로가 되는 지점은 나무도 이 비워냄을 이타적인 이유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유명한 동화 때문인지 나무는 모든 것을 내주기만 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나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실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수분을 얻기 위해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지만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 나무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이롭게 한다. 주어진 자리가 아무리 척박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꿋꿋하게 살아간 결과가 나무 자신을 살리고, 다른 모든 생명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291p,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이제 가능한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들과 소통을 시작해 봐야겠다. 내가 판단하는 당연함을 내려놓고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에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빈칸이 있으면 강박적으로 무어라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에서 벗어나, 계절이 바뀌고 옷장을 정리하 듯 과감히 덜어내야 한다. 인간에게 나이 듦이 두려운 이유가 사회에서의 쓸모에 관한 것이라면 역설적으로 그저 내가 비어있음으로 더 깊이 누군가를 채울 수 있음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잘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꽤 근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코코 할머니처럼 양갈래 머리가 잘 어울리는 발레 하는 할머니, 비움으로서 채워갈 줄 아는 어른, 그리고 최선을 다해 꿋꿋하게 살아간 결과가 흔적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나온 우스갯소리처럼 우리의 숫자는 이제 '볼드모트'가 되어 부를 수 없는 것이 되어 가는지 몰라도, 내가 살아온 경험들을 간직한 채 오늘을 아름다운 흔적으로 기록하며 걸음을 내딛고 싶다.



이전 09화 당신과 나의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