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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e Oct 10. 2024

내 행복을 보내드리니

희생에 대한 두려움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이들의 마알간 웃음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까르르 꽃망울이 터지듯 톡톡 피어나는 그 사랑스러운 몸짓과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모든 근심 걱정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만 같다. 지금 하는 일이 모든 어린이들이 사는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니 어쩌면 나는 덕업일치를 해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소개하다 보면 항상 듣는 말이 있다. "어이구 좋은 일 하시네요.  어려운 곳 다니느라 포기하고 희생해야 하는 게 많을 텐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감사한 말이지만 사실 이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나를 내려놓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누군가를 위해서 막중한 사명감을 가지고 임했다기보다 그냥 내가 궁금하고 좋아서 이 일을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나의 행복을 내적동기로 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주위 친구들과 조금은 다른 모양으로 살게 되었다. 사실 또래와 비교했을 때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혼자 사는 그것도 해외에서 은둔하는 삶은 때론 쓸쓸하기도 하지만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는 관계에서 벗어나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삶은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언제 어디서든 주체적일 수 있는 선택의 스펙트럼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 이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내겐 '희생'이었고 이 단어가 주는 무게는 인생의 문턱마다 넘어서야 할 가장 높은 허들이었다.


몇 년 전 달라이 라마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에게 아내와 자녀가 있었다면 영적 지도자로서의 삶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서 나는 의외로 철학적 삶의 고독함, 때론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 은둔자적 삶이 가진 약점을 느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버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용서와 겸손, 감사의 능력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 인생의 의미, 토마스 할란드 에릭센  76p


사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버리지 않는 삶은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다. 하지만 누군가와의 내밀한 관계를 통해 새로운 내가 탄생하고, 나의 일부를 비워낸 자리에 궁극적인 자아실현의 재창조가 이뤄진다는 것은 인생의 여러 시행착오로 배워왔다. 또 누군가에게 받았던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자리할 수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내 안에 작은 정원을 가꾸는 일에만 집중하느라,  그 안에 누군가를 들이고 이 기쁨을 나누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며 극 중 이익준이 보여주는 사랑의 주파수에 진동했던 적이 있다.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 모세혈관까지 맞닿아 있는 듯한 다정함은 조금 현실감이 없었지만, 처음으로 조건 없이 주기만 하는 사랑이 바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감응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 하느님. 저에게 이익준같이 저만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주세요."라고 기도했겠지만 어느새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을 주어도 더 채워주고 싶은 채송화 같은 사람을 허락해 주세요."라고 읊조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에겐 커다란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희생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나의 존재 이유를 기록하는 것이다.


나의 것을 내어 놓는다고 결코 소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손해는 볼 수도 있다. 내가 가진 기회와 시간을 포기하고 감수한다고, 그에 상응하는 인정을 받지 못할지도 세월의 흐름에 그저 당연한 것으로 퇴색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의 가치가 부정당한다고 생각했기에 어쩌면 더 두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불완전한 우리는 어떤 형태의 희생을 통해 누군가의 삶과 깊게 연결될 수 있다. 나는 나로서도 충분한데 굳이 꼭 연결되어야만 하는 걸까 싶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렇지만),  어쩌면 지금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남긴 흔적 덕분이고 유전자처럼 그 이야기가 이어져야 결국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의 일부를 연소하여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것은 나의 작은 정원에서 걸어 나와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공원을 조성하는 것과도 같다. 그 안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만 채우지 않아도, 때론 심고 싶은 꽃을 선택할 수 없대도 공원은 계절마다 다양한 색채와 향기로 피어나고 예상치도 못했던 다른 차원의 행복을 전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연결이 계속 이어져 나간다면 우리는 언젠가 청청한 숲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건 대외적으로 집을 떠나 머나먼 해외에서 타인의 안녕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내 안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타인을 향해 한걸음 떼는 일에 이토록 망설이고 주저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 나를 기록해 줄 수 있는 존재 앞에서 마지막 한 걸음을 걸어내고 싶다. 언제나 그 경계선에서 도망쳐 왔으니 말이다. 

너무 늦지 않을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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