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을 이은 관계의 작업 블록 프린팅
어린 시절, 선생님이 찍어주신 ‘참 잘했어요’ 도장을 기억하는가. 혹은 고무지우개를 깎아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 핑크색 사인펜을 칠해 책 한편에 찍어본 적은, 아니면 아이들이 손바닥이나 발바닥에 물감을 묻혀 도화지에 꾹 누르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이 모든 것은 모양을 가진 특정 물체에 염료를 입혀 찍어내는 블록 프린팅(block printing)과 무관하지 않다. 패턴을 만들어내는 인류의 가장 오랜 테크닉 중 하나인 블록 프린팅은 그 역사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양각으로 새긴 우드블록을 천연의 식물 염료에 담가 패턴을 찍어낸 코튼 소재의 옷이 당시 인도에서 바빌론으로 수출되었다 전해지는데, 블록 프린팅으로 유명한 인도의 서부 구자라트(Gujarat) 주와 라자스탄(Rajasthan) 주에서는 여전히 전통의 방식으로 페브릭을 만들고 있다.
블록 프린팅의 시작은 나무 블록을 만드는 것으로, 나무를 깎는 장인의 작업이 가장 첫 단계다. 한 번 만든 나무 블록은 매일같이 그를 염료에 묻혀 찍어야 하는 만큼 가장 단단한 나무로 만드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티크를 사용하거나 그보다 단단한 인디언 장미목(Indian Rose Wood), 즉 시샴(Sheesham)을 사용한다. 단단하고 변형이 없으며 천연 항균작용으로 쉽게 상하지 않아 건축자재 및 가구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 시샴은 인도 지역에서 특히 잘 자라는 나무다.
표면을 고르게 갈아낸 시샴 위에 하얀 초크 가루를 얹고, 그 위에 패턴을 그린 종이를 얹어 고정한 후 작은 바늘로 콕콕 두드려 나무에 베껴 넣는다. 패턴을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깎아 내는 이후의 과정은 단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냉정한 작업이다. 그저 숨죽여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무릎 높이에 놓인 작은 작업대 위 나무 패널을 끌로 두드리는 시간이다. 일종의 의식을 치르듯 장인의 작업은 고요하고 숙연하다.
다른 한쪽에서는 패턴을 찍어낼 페브릭을 준비한다. 원단을 만들면서 섞여 들어간 불순물과 엉킨 원사 등을 제거해야 패턴이 고르게 찍힐 뿐 아니라 염료도 잘 스민다. 바탕의 색이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바탕색을 먼저 염색해두는데, 흰 천이건 유색의 천이건 2~3회 세탁 후 말려내는 것은 같다.
세척을 거쳐 깨끗해진 페브릭은 작업대 위로 넓고 길게 펼쳐진다. 펼치는 작업도 중요한데 어느 한 군데 겹쳐져서도, 당겨지거나 느슨한 부분이 있어도 안된다. 나무로 만든 바퀴 달린 트롤리에는 염료를 담은 트레이가 놓이고 그 위로 블록이 살포시 머무른다. 장인은 평평하게 깔린 천 위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염료가 묻은 블록을 쿵 내려 찍고, 고른 패턴을 위해 서너 번 더 두드린다.
블록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옅은 염료로 스케치를 하듯 찍어내는 렉(Rekh, outline block), 바깥 라인을 찍는 것(Gudh, background block), 패턴 내부에 색을 채우는 두타(Dutta, filling block)의 세 가지다. 가장 뛰어난 마스터가 렉(Rekh)을 잡는데, 이 작업이 이후 작업의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트레이에 블록을 담가 염료를 묻히는데, 한 블록은 한 컬러만 사용하므로, 여러 색이 필요하다면 필요한 색의 개수만큼 동일한 개수의 블록이 필요하다. 마치 돌림노래를 하듯, 한 사람이 먼저 지나간 자리를 그다음 사람이 똑같이 지나와야 한다. 한 겨울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걸을 때 이전의 누군가가 남긴 발자국 위에 나의 발을 포개며 막막한 길을 조금씩 나아가듯, 앞사람의 표식 위에 정확히 블록을 포개 올려 패턴에 옷을 입힌다.
같은 블록이라 할지라도 그를 쓰는 사람의 압력에 따라 선명도가 다르고, 그것이 일종의 시그니쳐로 남아 장인들 사이에서는 누구의 작업인지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놓인 것은 오로지 긴 테이블, 그 위에 하루 종일 나무 블록을 내려 찍고 그를 손으로 두드리니, 작업장은 마치 큰 북이 된 듯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프린팅이 끝난 천은 뜨거운 방에 둔 채 쪄내듯 하여 1차로 색을 고정시킨다. 이 과정이 끝나면 야외에서 이삼일 물에 담가 불순물이 빠져나가게 하고, 내리치고 헹구고 비틀어 짜는 세척을 거친 후 햇볕에 바짝 말려 2차, 마지막으로 천을 다림질해 3차, 모든 프린팅을 단단히 고정한다.
나무 블록이라는 도구를 만드는 장인과 그를 사용하는 장인. 텅 빈 캔버스에 아웃라인을 찍어내는 장인과 그와 같은 도구를 들고 그 위를 오차 없이 지나야 하는 또 다른 장인. 블록 프린팅은 단순히 스탬프를 찍어 내어 패턴을 빠르게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다. 한 길을 가는 장인 자신만의 오롯한 작업 또한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 또 다른 존재와 굳게 연결돼 있음을 알고 서로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영혼들의 평생에 걸친 작업이며, 세대와 세대를 이어 같은 박자로 내 쉬어 온 호흡이다. 세상에 유일한 단 하나의 텍스타일. 그는 수천 년을 이어 온 이들의 배려와 존중, 신뢰의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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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0-qLUPW4K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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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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