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초반에 낯선 신조어 하나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파이어 족(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라는 용어로, 직역하면 ‘재정적 독립과 조기 은퇴’라는 뜻인데 FIRE 족(族)은 20대부터 극단적으로 절약해서 마흔 전후에 은퇴를 꿈꾸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미국 경제매체인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실비아 홀(38)이라는 고소득 전문직 독신 여성 변호사를 사례로 다룬 기사를 국내 일부 매체들이 번역해 소개했다. 기사에 따르면 실비아는 2년 후인 40세에 은퇴하는 게 목표인데, 이를 위해 세후 수입의 70%를 몽땅 저축한다. 목표 저축액은 200만 달러(약 22억 5,000만 원)이며 목표금액을 달성해서 은퇴하기 위해 떨이 과일이나 폐기처분을 앞둔 할인 채소만 사고 친구의 넷플릭스 아이디를 빌려서 공짜로 TV 프로그램과 영화를 무료로 보는 생활을 한다.
실비아 같은 독신자만 참여하는 게 아니다. 뉴욕타임스에서도 리킨스 부부를 파이어 족의 한 사례로 소개했다. 고소득 맞벌이인 리킨스 부부는 캘리포니아 해안가에 있던 고급 주택과 외제차를 포기하는 대신 집값이 저렴한 오리건 주로 이주했다. 이들은 아이를 낳은 후 생각을 바꾼 케이스라고 한다. 실비아나 리킨스 부부처럼 마흔 전후에 조기 은퇴를 준비하며 극단적으로 절약하는 사람들이 파이어 족으로, 이들은 은행 빚이나 소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일찌감치 은퇴해서 살고 싶어 한다.
구글에 들어가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로 검색을 해보면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온다. 파이어 운동은 1990년대 미국에서 움텄는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세를 불렸다. 금융위기 영향에 따른 불황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밀레니얼세대(1981~1996년생)가 특히 파이어 운동에 관심이 높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파이어 운동이 일어난 배경으로 “성취감을 얻을 수 없는 직장에 대한 불만과 전통적인 사회보장제도 붕괴, 불황 속에서도 더욱 안정됨 삶을 향한 열망”을 지목한다.
파이어 운동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최대한 돈을 모으려고 자신과 가족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인다는 점 때문이다. 또 실비아가 우리 돈으로 22억 원이 넘는 은퇴자금을 목표로 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그 정도를 모을 수 있는 고소득자나 가능한 방법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다. 칼럼니스트 미셸 싱글터리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실비아처럼 고소득자가 아니면 기껏해야 소득의 10~15% 정도나 겨우 저축할 수 있는 저소득층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는 우려를 표시했지만, 사람들이 비용을 줄이고자 노력하는 데에는 박수를 보낸다며 응원의 뜻을 전했다. 자동차 같은 감가상각이 큰 자산이나 주택 담보 대출에 너무 많은 돈을 묶어놓지 않는 생활방식은 의미가 있다면서 말이다.
그는 또한 금융투자회사 TD 아메리트레이드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해 파이어 운동이 단순히 조기 은퇴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점도 언급했다. 이 조사에서 응답한 경제적 독립을 이룬 75%는 조기 은퇴보다 재정적 안정이 더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는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한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더불어 극단적인 절약 자체가 핵심사항이 아니라는 점도 거론했다. 응답한 경제적 독립을 이룬 이들의 67%는 극단적인 절약은 가치가 없다고 답했다. 또한 이들은 30대에 적극적으로 저축하고 투자한다면 복리 효과 등을 통해 충분히 재정적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성공적인 파이어 족으로 꼽히는 인물 중 하나인 칼 젠슨의 사례도 흥미롭다. 젠슨은 자신이 조기 은퇴를 진행해가는 과정을 자신의 블로그 ‘자유를 향한 1,500일(1500Days to Freedom)’(www.1500days.com)에 공개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하며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그는 어느 날 회사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나서 조기 은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2013년 1월부터 이 블로그를 시작한 그는 우선 2017년 2월까지 부채 없이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모으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58만여 달러(약 6억 5,000만 원)의 자산을 들고 시작해 3년 후인 2016년 초에 100만 달러를 넘어서며 목표를 조기에 달성했다. 5년 후엔 2018년 초에는 152만 달러(약 17억 원)까지 자산을 불렸다. 그에게는 아직 10만 달러의 주택 대출이 남아 있지만 열심히 모아서 주택 대출을 상환할 생각이다. 37세에 조기 은퇴 준비를 시작한 그는 2019년 현재 43세로 은퇴에 성공했다.
한 인터뷰에서 젠슨은 현재 은퇴자산에서 매년 4% 정도를 인출해 생활비를 조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자산은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되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은 그의 블로그에 상세히 소개돼 있다. 젠슨은 특히 “조기 은퇴용으로 마련한 자금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라며 조기 은퇴 후 삶이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피곤한 사회생활을 접고 회사를 탈출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젠슨의 얘기처럼 우리가 회사를 탈출하는 것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스트레스 없이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