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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ica Jun 05. 2019

1차 은퇴가 무슨 뜻이죠?

내 블로그와 감수했던 책 등 내 소개란이 있는 곳마다 나는 내가 1차 은퇴한 상태임을 간단히 적어 놨다. 그랬더니 이 1차 은퇴라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냐고 묻는 사람들이 생겼다. 은퇴면 은퇴지 1차 은퇴라고? 2차, 3차 등 은퇴에도 단계가 있다는 뜻이냐는 물음일 것이다. 바로 그렇다. 


연금이나 월세 등을 받으면서 어딘가로 출근을 하거나 노동력을 파는 등의 직접적인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며 봉사나 여행, 골프, 텃밭 가꾸기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은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미 은퇴 후 노후를 보내는, 나보다 윗세대 어른들의 경우 실제로 이렇게 사는 분들이 많다. 


회사를 탈출한 다음에 즉시 이렇게 하고자 한다면 그리할 수도 있겠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회사 탈출을 하는 사람들은 조기은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조직생활 스트레스 없이 자기주도적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더 큰 사람들이다. 1차 은퇴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후반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급여 생활자 생활을 일단 끝냈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사표를 내고 나면 1차 은퇴가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이건 매우 다른 얘기다. 생계 고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는 급여생활자에서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로 자리만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수입이 들쭉날쭉해서 생활이 불안하다는 게 흠이다(일부 억대 연봉자급 프리랜서들은 제외). 


이를 고려해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은 회사를 나오더라도 최소한의 생활비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놓고, 어느 정도의 안전판 위에서 새로운 인생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회사 탈출 자금이란 그런 까닭에 ‘프리랜서 혹은 자영업’ 진입의 안전망이 된다. 지금 시대의 회사는 우리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입증된 마당이니 우리가 우리 미래를 위해 준비한다는 개념이다.


궂은 날 나를 지켜주는 우산처럼 회사에서 탈출할 때도 우산 같은 자금이 있어야지!


1차 은퇴의 핵심이 되는 회사 탈출 자금은 ‘급여 없이도 생활비를 감당하는 고정수입’이다. 이직이나 퇴사 관련 책이나 기사들을 보면 6개월 정도의 생활비를 준비하고 퇴사하라는 내용이 꽤 많은데, 이렇게 원금을 갉아먹으며 줄어드는 저축을 볼 때마다 공포감을 느끼는 것은 제대로 된 회사 탈출이 아니다. 게다가 이래서는 또다시 다른 직장을 구해서 조직생활 스트레스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 거듭 말하지만 1차 은퇴의 핵심은 ‘생활비 걱정 없는 시스템을 만든 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은 사회경력 10년 미만인 젊은 친구들이 호기롭게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서 뭔가를 도모하는 것과도 다르다. 젊은 패기가 아니라 노련함과 전문성이 필요해서다. 사실 나는 회사를 탈출하기 전에 나의 새 직업인 작가와 번역가가 배고프다는 얘기를 하도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서 약간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회사를 그만 둔 후로 그다지 일거리에 목이 마르지는 않다. 그동안의 경력과 인맥이 자연스럽게 일로 연결되고 있어서다. 출판사를 하는 선배가 내가 독립한 것을 알고 바로 재테크 분야 책 집필과 번역, 감수를 의뢰하기도 했고, 일면식도 없던 출판사 기획자가 내 예전 기사들을 보고 페이스북으로 연락해 투자 분야 책 집필을 의뢰하기도 했다. 즉 그동안 직장생활로 익힌 글쓰기 능력과 금융/투자 분야 전문성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새 직업으로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1차 은퇴 후 하는 일은 생계형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준비된 회사 탈출 자금만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어야 몸도 마음도 편안하다. 


경제활동을 안 해도 밥 먹고 살 수 있으니 아무것도 안하고 유유자적 사는 것은 어떨까? 물론 그렇게 살고자 하면 그리하면 되겠지만, 이는 진정한 1차 은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건 그냥 은퇴다. 1차 은퇴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며 산다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일하는 자의 일하는 즐거움을 무시한 채 가족이나 본인의 생활비를 벌기 위한 생계형 노동 판매 행위는 물론 거룩한 일이지만 동시에 슬프기도 하다. 


『이방인』을 쓴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일찍이 이렇게 통찰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그렇다. 우리는 영혼 있는 노동을 하고 싶어서 회사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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