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
월요일 밤에는 두바이의 최고급 호텔 '버즈 알 아랍'을 반쯤 쌓아 올렸다. 운동을 가지 않아 시간이 많이 남는 화요일에는 부지런하게 건축을 마무리했다. 수요일 밤에는 싱가포르의 '머라이언 상'을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오늘은 터키 카파도키아 하늘을 나는 열기구를 한 땀씩 꿰매다가 한쪽 구석에 밀어 두고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을 짓는 대장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버즈 알 아랍'은 184조각, '머라이언 상'은 210조각, '바실리 성당'은 394조각이 필요하다. 바로, '스티커'가.
어쩌다가 이렇게 스티커 붙이기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퇴근하고 집에 달려가 스티커 갖고 놀 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스티커를 떼어서 번호를 찾아 모양에 맞게 붙이고, 반복 또 반복, 그러다 보면 예쁜 작품이 짜잔! 눈을 반짝이며 스티커 붙이기의 훌륭함을 설파했더니 한참 듣고 있던 선배가 한 마디 하셨다. "너 지금 진짜 행복해 보인다." 스티커에 푹 빠진 내 얼굴을 거울로 안 들여다보아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 단순한 즐거움이 내 삶을 더 유쾌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한 와중에도 '자기 전까지 30분은 할 수 있다'며 굳이 스티커를 집어 드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스티커 사랑을 전도한 결과 나와 똑같은 스티커 책을 산 동료 직원도 생겼다. 서로에게 전날의 성과를 공유하는 기쁨까지 누리고 있으니 이 즐거움은 쉽게 누그러들지 않을 듯하다.
지난 토요일 동네 서점의 '취미' 매대 위에서 이 책을 찾아냈다. 왠지 설레는 마음이 들어 책을 두 손에 꼭 쥔 채 서가를 한참 어슬렁거리다가 결국은 다시 매대 위에 내려두었다. '가격 14,800원', 조그맣게 적힌 한 줄 때문이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직장이 있는데, 이 정도 가격에 움츠릴 만큼 사정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저 한 줄에 마음이 탁 걸려 멈춰 섰다. '실용적이지도 않은 것을 비싸게 사다니, 절약하는 너에게 맞지 않는 씀씀이야.' 마음껏 장난감을 골랐다가 엄마에게 저지당해 빈 손이 된 아이처럼 서점을 빠져나왔다. 물론 그 아이보다는 내가 사정이 낫다. 스티커 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결국 인터넷에서 두 권 묶음을 반값에 파는 곳을 찾아내 주문까지 했으니.
얼마나 스티커 붙이기 놀이가 맘에 드는지 엊그제는 스티커 꿈도 꾸었다. 옷걸이에 척척 걸쳐놓은 전지 크기의 종이에는 각양각색의 스티커가 잔뜩 달려있었다. 올록볼록 폭신한 스펀지 스티커, 매끈하고 투명한 에폭시 스티커, 카카오프렌즈가 귀여운 몸짓을 선보이는 스티커, 어릴 때 학습교재 맨 앞쪽에 수록되어 소중하게 아끼던 스티커... 어릴 적 가끔 한두 장 생기면 보물상자에 모아 두고 쳐다만 보았던 스티커들이 꿈속에서 수백수천 배로 불어났다. 문방구에 가서 스티커를 사달라고 조르기에 우리집은 가난했고 유치원생인 나는 그건 잘 알고 있었다. 엄마가 6살 배기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워 더 이상 유치원에 갈 수 없다'고 말할 때도 의젓하게 그 뜻을 이해하는 아이였으니까. 꿈속의 나는 스티커 다발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풍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흡족해하다가 의문에 빠졌다. "이렇게 많은데, 왜 단 하나도 떼어서 쓰지 못했지? 왜 나는 절대 쓰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수줍게 꿈 이야기를 꺼냈더니 친한 언니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는 사람 중 하나는 취직을 하고 첫 월급을 받은 날 배스킨라빈스에 가서 네댓 명이 먹을 법한 커다란 통에 든 아이스크림을 턱 샀더란다. 그리고 집에 가서 혼자 그걸 다 먹으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단다. 취직 전일지라도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어 아이스크림을 사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나는 그러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좋은 것을 즐기고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에게 아이스크림 한 통은 마음의 가난에서 벗어난 것을 자축하는 소박한 기념품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의 기쁨을 위해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인생을 쓰는 것에 너무나 야박했던 어제에게 건네는 위로의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퇴근하고 집에 가서 어제 쌓다만 '바실리 성당'을 마저 지을 것이다. 아마 내일까지 계속 매달려야 겨우 완성하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괜찮다. 친구에게 '오사카 성'이나 '자유의 여신상'을 나눠준 다음에 카페에 마주 앉아 조잘조잘 수다를 떨며 계속 붙이면 된다. 그래도 다 못해낸다면 또 어때. 나는 스티커 책이 두 권이나 있고 퇴근하고 언제든 스티커 붙이기를 할 수 있는 어른인데 말이야. 사소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잘 찾아내서 기꺼이 자신에게 선물할 줄 아는 멋진 어른이 되었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