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노는 걸 제일 좋아하는 아이에게

미안하고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위하여

by 박유미

어린이날을 맞이해 특별히 무얼 하고 싶은지 물었다. "하루종일 안 나가고 집에 있을래요!" 나의 아들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며칠 있으면 아이의 여섯 번째 생일과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어떤 하루를 보내고 싶은지 질문하면 또 '집에만 있겠다'고 하겠지. "그래, 하루종일 나가지 말자."고 응할 때 혁이 얼마나 기쁜 표정을 짓는지 나는 보았다. 오늘은 남편이 외부일정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집을 비운다. 아직 고요히 잠들어있는 아이의 꿈 속으로 들어가 말을 걸어본다. 엄마랑 종일 집에 있는 토요일 어때? 신나서 몸을 붕 띄우고 환호성 지르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쉬는 날 어디에 가고 싶은지 매번 아이에게 묻는다. 어제 저녁의 대답은 참신했다. 엄마, 우리 카페 갈래요? 바깥으로 나가자고 스스로 청한 경우는 처음이라 놀랍고 반가웠다. 물론 온종일 집에 머무는 것을 전제로 잠깐 카페에 들르자는 말이지만. 점심도 나가서 먹자고 부추겼더니 혁이 얼떨결에 승낙했다. 어쩌면 오늘 꽤 긴 산책을 하고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외출 자체를 싫어하는 아이는 아니다. 전자제품 매장에 들어가 게임 해보는 것도 좋아하고, 갑천 따라 걸으며 몇 시간씩 노는 것도 좋아한다. 대중교통과 도보만으로 이동하는 여행도 씩씩하게 다니고, 낯선 숙소에서도 깊게 잠든다. 문제는 그 무엇보다도 집에서 노는 게 훨씬 좋다는 거다. 외출해도 즐겁게 잘 놀 수 있음을 경험으로 기억할 테지만, 집이 너무 좋은 탓에 문 밖으로 한 발짝 떼기가 어렵다. 어린이날 신발 한 번 안 신고 집 안에만 있었던 일이 행복한 경험으로 남은 아이다. 카페 가자는 반응이 반가운 이유다.


혁은 일부러 바깥에 나가 운동한 적이 거의 없는 아이였다. 엄마인 내가 어린 시절부터 마흔을 앞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 특이하게 여길 구석은 없다. 유전자 탓이든 생활습관을 보고 배운 탓이든 아이가 나를 닮았다는 게 안타깝고 미안했다. 억지로 바깥으로 밀어내 뛰어놀으라 해도 잠시일 뿐 되돌아와 책을 펴들고 꼼짝 않는 아이, 다시 나가고 싶지 않다고 고집 부리는 아이가 꼭 내 모습 같아서 나는 항상 옅은 죄책감에 싸여 있었다. 나름대로 갖가지 노력을 해보았지만 아이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러했고. 그러나 보이지 않게 우리는 움직였고 나는 복싱장으로, 아이는 검도관으로 향할 수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조금씩 눈에 띄던 혁의 변화는 이번 주 들어 뚜렷해졌다. 애아빠가 살살 꾀어내 함께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에 다니기를 여러 차례한 끝에, 며칠 전 아이가 먼저 운동장으로 가자고 졸랐다! 나는 6년 만에 처음 보는 활기찬 외출이 신기하고 기뻤다. 더 신기한 걸 이제서야 하나 더 발견했다. 나는 아이 곁에서 지친 기색도 없이 트랙을 달리고 줄넘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아이가 집보다 더 좋아한 건 자기 곁에서 달리며 웃는 엄마의 얼굴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집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한다. 거실 책장 앞에 앉아 골똘히 책장을 넘기는 혁을 가만히 바라보는 게 내 아침과 저녁 일과 중 가장 큰 부분이다. 혁의 등 너머에 있는 널따란 식탁 겸 책상에 앉아 나도 책을 편다. 그게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다. 적극적으로 놀아주지 못하는 엄마라 아쉬워도 이런 시간을 보내고나야 힘차게 아이와 나 자신을 돌볼 기력을 모을 수 있으니. 바닥에 앉은 아이 뒤편으로 슬며시 다가가 아이를 품에 안고 각자의 책을 읽는다. 꼭 붙어 있기만 해도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다. 아침 7시 30분, 토요일인데도 일찍 일어난 아이가 내 품 안에 있다.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서 혁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있었어." 곰곰히 듣던 아이가 제목은 '엄마 새끼손가락'으로 쓰라고 하더니 금세 농담이라며 원래 하려던 제목으로 하란다. 혁은 지금 내 무릎 위에 앉아 자기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고 있다. 내가 거의 다 썼으니 5분만 기다려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키보드를 빠르게 움직이는 내 손을 혁이 살짝 붙잡는다. 혁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는 엄마의 새끼손가락이다. 갓난아기 때 내 새끼손가락을 잡고 잠들던 버릇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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