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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Dec 01. 2021

미처 몰랐습니다.

⑤ 일본의 민비 시해 원인은 전신선 확보

1895년 10월 8일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일본 군부와 낭인들이 합작하여 저지른 조선 왕비(조선 26대 왕 고종의 정실 보통 민비로 부르지만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성황후로 추존됨)의 시해 사건, 즉 을미왜변(乙未倭變)의 진상은 명확하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진다. 하나는 일왕 직속의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大本營)이 주도하여 저지른 국가범죄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군이 군사작전을 통해 민간인을 살해한 전쟁범죄라는 것이다. 전쟁범죄는 시효 없이 소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을 벗어날 수가 없다(배영대 2017). 일본은 왕비 시해는 일본 정부와 상관없는 낭인들이 저지른 사건이라거나 또는 당시 미우라 고로 주한 공사의 지시 아래 자행된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진실을 은폐하거나 회피하고 있지만 시간이 가면서 일본의 거짓말은 드러나고 있다. 당시 우치다 사다쓰지 주한 영사는 일본 정부에 보낸 보고서 등을 통해 민비 시해 사건의 주범은 일본이고 이는 '역사상 고금을 통틀어 전례 없는 흉악한 사건'이라고 실토하고 있다(김문자 2011). 또한 최근 발견된 왕비 시해에 직접 가담한 일본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왕비 시해를 자백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일본이 역사상 전례를 찾기 어려운 흉악한 사건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일국의 왕비를 살해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을미왜변(1895)의 전해인 1894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철도와 전신은 근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2대 인프라에 해당한다. 근대 전쟁에서는 속도가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전신선 전에는 역참이나 봉수를 이용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해외 주둔 군대와 외교관에게 대본영의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전신선을 필요로 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7-1895.2)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제멋대로 조선에 전신선을 부설했고, 또 조선의 전신설비를 강탈해서 일본군의 감시하에 두었다. 일본은 개전(開戰) 이틀 전인 7월 23일 불시에 경복궁에 침입해서 왕궁을 무력 점령하고 고종을 압박하여 '조일잠정합동조관'(1894.8)에 강제로 서명하게 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경부, 경인 간 철도 부설권 및 전신선 설치관리권, 목포항 개항 등을 강압적으로 획득했다(김문자 2011). 통신, 수송, 병참 등 청일전쟁을 위한 포석을 미리 깔아놓았다. 장기적으로 이들 인프라는 러일전쟁(1904-1905)을 위한 사전 정비작업이기도 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의외로 쉽게 승리하여 기고만장했다. 청국에 사대외교를 하면서 기를 펴지 못하고 지냈는데 그런 중국을 상대로 이겼으니 그 기세가 어떠했을까 싶다. 이제 일본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신흥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었지만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러시아를 필두로 한 삼국간섭이 시작되었다. 청국은 패배 후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의 주요 사항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청국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인정하고, 둘째는 배상금 2억 량(일본 화폐 약 3억 엔,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은 8천만 엔)을 일본에 지불하고, 그리고 셋째는 랴오둥(遼東) 반도와 타이완  및 펑후(澎湖) 열도를 일본에 할양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랴오둥 반도를 일본에 할양한다는 조항에 대해 러시아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에 착수하여 남하정책을 추진 중이었는데 청국의 수도 베이징과 가까운 랴오둥 반도가 일본에 넘어갈 경우 일본이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을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 독일과 연대하여 랴오둥 반도를 청국에 다시 돌려주라고 압박했다. 당시 러시아를 비롯한 삼국과 대결할 힘이 없었던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에 대한 간섭도 노골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약점이 드러냈다. 이때를 기회로 조선 조정에서도 인아거일(引俄拒日), 즉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여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인아거일 정책의 중심에 민비가 있었다(이종각 2009).


다시 전신선 문제로 돌아가자. 정상적이라면 청일전쟁 후 일본은 본토로 돌아가야 하고 전쟁 중에 강압적으로 관리했던 전신선도 조선 정부에 반환, 귀속시켜야 할 것이다. 삼국간섭으로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수차례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조선에 설치된 전신선 확보를 계속하기 위해 일본군 주둔을 희망했다. 이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를 가로막는 왕비를 제거하여 친일정권의 확립해야 했다.


당시 조선의 전선 설치 현황을 보자.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신이 도입된 것은 1885년 서울과 인천에 최초의 전신이 가설되고 이를 관할하기 위해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이 개국되면서 전신이 시작되었다. 이후 의주까지 전신이 가설되어 인천-서울-의주에 이르는 서로전신선(西路電信線)이 완전 개통되었다. 이를 통하여 청나라를 거쳐 유럽까지 통하는 국제 전신도 연결되었다. 1888년 서울과 부산을 잇는 남로전신선(南路電信線)이 개통되었다. 조선은 이를 위해 서로전신선을 운영하는 한성전보총국과는 별도로 조선전보총국을 창설하였다. 1891년 서울에서 원산에 이르는 이른바 북로전신선(北路電信線)이 개설되었는데, 이는 본래 함경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되도록 계획되었다. 또 놀라운 것은 1884년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를 잇는 해저케이블이 놓아졌다는 사실이다. 이 해저전선은 일본 정치·경제적 목적을 위해 설치하였다.



청일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할 명분은 없었다. 일본은 조선에 주둔할 군대의 명분을 전신선 보호에서 찾았다. 당시 항일투쟁은 일본군이 지키는 전신선을 절단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의 일부 외교관들은 '전신선의 조선반환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경질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일본은 대신 강경노선의 외교관을 파견했다. 강경론자가 바로 왕비 시해를 주도한 미우라 고로 주한공사였다. 일본은 삼국간섭과 열강의 압력으로 불법 강점하였던 전신 선로를 일시 반환하기도 했지만, 러일전쟁 이후에는 보다 더 노골적으로 조선의 통신을 강제 수탈하였다. 어디 통신뿐이더냐. 조선 전역을 일본군 군사용지로 내준다는 협정(한일의정서)을 맺었다.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 조선 왕비를 시해한 사건의 근본적인 발단에는 전쟁 수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신선 확보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말이 길어지고 말았다. 일본의 조선 왕비 시해 사건은 크게 세 가지 상황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 첫째, 청일전쟁에 따른 강화조약이 청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삼국이 일본의 급격한 세력 팽창을 우려하여 삼국간섭을 시작하였다. 일본은 삼국과 열강의 눈치를 보는 듯했지만 조선 병합이라는 야욕을 숨기면서 장애물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둘째, 일본정부는 조선에서 일본이 전신선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일본군의 주둔을 관철시키기 위해 육군 중장 출신의 강경파 미우라 고로를 주한공사로 임명하였다. 셋째, 미우라 공사는 일본정부의 비호 아래 친일정권 수립의 최대 장애물이 되는 왕비를 제거하기 위해 일본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러니 조선 왕비 시해 사건은 국가범죄요 전쟁범죄가 되는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살해한 뒤 검사의 심문에 15가지의 이유를 들었다. 그 이유들 중 첫번 째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명성황후를 죽인 죄"이다(최서면 1994). 이토는 조선 왕비가 시해당할 당시 일본 총리였다. 조선 왕비 시해 사건에는 일본 정부와 일본 군대가 주축이 되었지만 조선인들도 연루되었다. 그들 중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조선 훈련대의 대대장이었던 우범선은 적극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였고 왕비의 시신을 소각하도록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우범선은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 우장춘의 아버지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즉 경복궁을 야밤에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참수하라는 포고령을 발포한다. 이 난신적자의 명단에 우범선도 포함되었고 그는 고영근이라는 자객에게 일본에서 살해되었다(이종각 2009). 조선 왕비 시해 사건, 즉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극과 관련하여 백범 김구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김구의 원래 이름은 김창수로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왕비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군인을 살해하고 자수했다(김구의 일본군인 살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도 하다).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영에서 감옥생활을 하던 중 고종의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백범은 서울과 인천 간에 설치된 전신선 덕분에 살아났다고 한다(김구 1995). 


김구. (1995). <백범일지>. 범우사.

김문자. (2011).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태학사.

배영대. (2017). <중앙선데이>. <황후 시해, 낭인 아닌 일본 육군 소위가 자행한 '전쟁범죄'>. 8월 20일.

이종각. (2009).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동아일보사.

임종업. (2011). <한겨레>. <[유레카] 을미사변의 진짜 이유>. 6월 5일.

정광용. (2010). <부산일보>. <[이 주일의 역사] 국내 첫 전신선 개통(1885.9.28)>. 9월 27일.

최서면. (1994). <새로 쓴 안중근 의사>. 집문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일잠정합동조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53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9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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