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Mar 15. 2023

미처 몰랐습니다.

조선의 왕인(王仁) 박사, 강항(姜沆)의 유산과 교훈

우리나라 지방도로에서 지역 명사(名士)의 이름이나 호(號)를 딴 도로명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승용차로 광주에서 함평을 지나 영광 불갑사 쪽으로 가다보면 강항로(姜沆路)라는 도로명이 나타난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추석을 쇤 다음 날 저자는 영광 불갑사 근처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선배의 초대를 받아 방문하게 되었다. 선배는 조선의 유학자이면서 정유재란(1597년)이 발발했을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왜군의 포로가 된 수은(睡隱) 강항(1567∼1618)의 제13대 손이다. 강항로를 따라가면서 이 지역이 강항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은 했지만, 선배가 바로 그 후손이었다. 선배와의 만남을 계기로 강항에 대해 더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널리 알려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강항은 어떤 사람인가? 강항은 조선의 뛰어난 문장가로 손꼽히는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이다. 강항이 전라도 영광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조부 강학손(1455∼1523, 강희맹의 차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강학손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1431-1492)의 문하생으로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1498년)로 파직되어 영광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반정(1506년)으로 왕이 된 중종은 강학손을 한성판윤으로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영광에 머물러면서 후학 양성과 향촌 발전에 전념했다. 사평공(司評公)으로 불렸던 그는 제방을 쌓아 못을 만들고 연(蓮)을 심어 관상하였을 뿐 아니라 제방 앞 개천에 돌다리를 놓는 등 향촌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지금도 이곳의 앞들은 사평들, 연못을 사평방죽, 다리는 사평다리라고 부른다. 유배지 영광에서진주 강씨는 대대로 덕망과 학덕을 쌓으면서 지역 명문가로 뿌리를 내렸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강학손의 외손이다. 


강항은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조상은 사화로 거의 멸문지화를 당할 뻔했다. 강항은 일찍이 문재(文才)가 뛰어났고 특히 기억력이 비상했다고 한다. 강항의 비상한 재능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강항이 7세 때 서당에 가던 중 책장수가 갖고 있는 <맹자>를 보고 그 자리에서 암송했다고 한다. 책장수가 강항에게 책을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강항이 받지 않자 <맹자> 한 질을 마을 정자나무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이 마을을 '맹자마을'이라고 부르고 <맹자>가 걸려있던 정자는 맹자정(孟子停)이라고 불렀다(김경옥, 2010). 강항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우계(牛溪) 성혼(1535-1598)의 문하생으로 공부했다.  


강항은 어떻게 일본으로 가게 되었을까? 일본은 임진왜란(1592년)에 이어 정유재란(1597년)을 일으켜 조선을 재침략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분전으로 전라도를 지킬 수 있었지만, 정유재란 때는 원균의 패배로 제해권을 잃게 되면서 전라도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강항은 남원성 일대에서 군량을 조달하는 종사관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전라도의 전략적 방어기지였던 남원성마저 무너졌다. 강항은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임을 깨닫고 의병을 해산한 뒤 삼군통제사로 다시 부임한 이순신 장군 휘하에 합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597년 9월 23일 강항은 왜군에 발각돼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강항과 가족이 일본으로 가는 과정과 현지 포로 생활은 비참했다. 강항은 후일 “우리 형제의 자녀는 모두 6명이었으나 바다에서 죽은 자가 3명, 일본에서 죽은 자가 2명, 살아남은 자는 겨우 어린 여자 아이 1명뿐이었다”라고 기록했다. 1597년 10월 13일을 전후하여 시코쿠 에히메이현 오즈성에 도착하고 1598년 5월 25일 1차 탈출을 결행하지만 곧바로 체포되었다. 1598년 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강항은 오즈성에서 오사카로 옮겨지고, 1599년에는 교토 후시미로 이주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강항이 어떻게 왜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강항이 일본에 포로생활을 하면서 선조에게 보낸 적중봉소(賊中封疎), 즉 적국에서 선조에게 보낸 상소문에 적힌 글이다. 강항은 조선을 침략한 왜군을 적(敵)이라는 단어 대신 도둑 적(賊)으로 표현했다. "신은 지난 정유년에 분호조 참판(分戶曹參判) 이광정(李光庭)의 낭청으로 있으면서 명나라 장수 양총병(楊摠兵)의 군량을 호남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었습니다. 군량을 거의 모았는데 적의 선봉이 이미 남원(南原)에 박두하자 이광정 역시 서울로 떠났고 신은 순찰사의 종사관인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였더니 나라를 생각하여 모인 자가 겨우 수백 명이었는데 그나마 자기 가족들을 생각하여 곧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신은 어쩔 수 없어 배에다 아비· 형· 아우· 처자를 싣고 서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갈 계획을 했었지만, 뱃사공이 서툴러 제대로 배를 운행하지 못하다 보니 바닷가에서 맴돌다가 갑자기 적선(賊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은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가족들과 더불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배를 매두는 해안이므로 물이 얕아 모두 왜놈들에게 사로잡히게 되었고 오직 신의 아비만이 딴 배를 탔기 때문에 동시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모면하였습니다." (선조실록 권 111, 선조 32년 4월 15일 갑자).


여기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양란에 걸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피로인에 대해 살펴보자. 피로인(被虜人)은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 포로가 된 경우와는 다르게 민간인이 적군에게 붙잡힌 경우를 말한다. 조선피로인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본학자는 2-3만으로 추정하면서 되도록 적게 추산하고, 한국학자는 10만에서 40만까지 추정하고 있다. 조선인 포로가 집단거주하는 섬이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포로가 끌려갔을까 싶다. 일본군이 조선인을 붙잡아 본국으로 끌고 간 이유는 대략 일곱 가지 정도다. 첫째, 전투 중 잡혀 끌려간 경우, 둘째, 전투지역에서 군량수공·축성·잡역 등의 사역을 위한 경우, 셋째, 일본 내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경우, 넷째, 도공 등 기술자의 납치, 다섯째, 여자와 동자(童子) 중 미모와 재능이 있는 경우, 여섯째, 전쟁 중 일본인에게 협력한 경우, 일곱째, 노예매매를 목적으로 한 경우 등 다양하다(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본은 조선에서 끌고 간 수많은 피로인(被虜人)들을 해외 노예무역상들에게 팔았다. 노예를 사는 큰 손은 포르투갈 노예상들이었는데, 과잉공급으로 마카오 노예시장의 시세가 예년의 6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수많은 조선 사람이 베트남, 태국, 인도, 유럽으로 헐값에 팔려나갔다.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1573~1636)는 <나의 세계 일주기>에서 “조선인 노예 5명을 12 에스쿠도(포르투갈 화폐 단위)에 샀다”라고 썼다. 그때 흑인 노예 1명의 가격이 100 에스쿠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헐값이었는지 알 수 있다. 조총 한 자루와 조선인 노예 40명을 교환할 수 있었다(권경률, 2021).

 

강항은 국내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알려졌다. 백제 왕인이 일본의 공식 초청을 받아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비롯 기술공예의 전수, 일본가요의 창시 등에 공헌함으로써 일본 황실의 스승이며 정치고문으로 백제문화를 전수하면서 일본의 아스카 문화의 꽃을 피우는데 기여했다면, 강항은 일본에 성리학을 전하고 후학을 양성한 제2의 왕인 박사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강항이 남긴 유산과 교훈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강항은 언제나 우국충정의 조선인임을 잊지 않았다. 강항은 일본의 조선 침략과 그 침략으로 인한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 절박하게 경험하고 다시는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방지하고자 했다. 그가 남긴 적중봉소((賊中封疏), 즉 비록 적에게 사로잡힌 피로인의 신세지만 왜군의 동태를 기록하여 조선의 왕에게 보고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세 번에 걸쳐 적중봉소를 조선에 보냈는데 두 번째 봉소가 선조에게 전달되었다. 일본에 온 명나라 사신을 통해 선조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강항이 1560년 조선에 귀환했을 때 선조도 강항의 우국충정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관직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낙향하여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둘째, 강항은 유학자로서 일본에 유학을 보급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피로인의 신분이었지만 일본 성리학의 비조(鼻祖)가 되었을 뿐 아니라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에게 조선의 유교문화를 전수하는 등 일본 유학의 기틀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의 도움으로 사서오경에 일본어 주석을 달아 유학을 널리 보급할 수 있었다. 세이카를 일본 유학의 개조(開祖)라고 부르는 이유다.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리잔(林羅山)은 학교를 세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교육하면서 일본의 교육문화를 확립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낭인 출신 나카에 토쥬(中江藤樹)는 사서오경을 접하고 칼을 놓고 '무사의 유교화'에 힘을 쏟았다. 강항의 일본 후학들은 서양학문의 개념들을 동양적인 개념으로 흡수하여 실사구시형 성리학을 만들어냈다. 깊은 사유와 실천적 기질을 갖게 된 일본 학자들은 서양학문이라 불리는 ‘난학’(蘭學)이 쉽게 일본에 뿌리내리도록 했다. 더 나아가 강항은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학문적, 사상적 틀을 제공했다. 여기서 꼭 짚고 가야 할 것은 세이카의 제자 리잔은 일본 성리학의 대가이지만 극우보수학자로 성리학을 포로 신분인 강항에게 배웠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일본이 퇴계 이황의 학풍을 받아들여 일본 성리학을 발전시켰다는 논리를 펼쳤다는 점이다. 또 리잔은 교통의 '코 무덤'(鼻塚)이 '야만스럽다'는 이유로 '귀 무덤'(耳塚)으로 부르자고 앞장섰다(정유진, 2019). 섬나라 일본 문화의 열등의식을 보는 장면이다. 문화적 열등의식은 오늘날 일본의 역사 왜곡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 유학의 계통을 이황-강항-후지와라 세이카-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로 본다.


셋째, 강항은 일본 현지에서 피로인으로서 겪었던 경험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간양록'(看羊錄)을 전했다. 간양록은 강항이 1597년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1600년 5월 귀국하기까지 2년 7개월간 겪었던 체험과 정보를 기록한 글이다. 간양록은 적군의 포로가 되어 기록한 전쟁포로 문학의 백미(白眉)다. 간양록은 원래 책 제목은 '건거록'(巾車錄)이다. ‘건거’란 천으로 가린 수레, 즉 죄인이 탄 수레의 기록을 일컫는다. 강항은 불가항력적으로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임금의 뜻에 부응하지 못한 죄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국충정의 충의와 절개를 지닌 강항다운 생각이다. 강항의 수제자인 윤순거(1596-1668) 등 후학들은 스승 강항이 세상을 떠난 뒤에 '건거록'을 ‘간양록’(看羊錄)으로 바꿨다. 일본에서 강항이 지은 시구(詩句)에서 문자를 취해 책 제목을 바꾼 것이다. 전후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강항은 왜군에게 포로가 된 전라좌병영의 무관 이엽(李曄)이 일본의 회유를 뿌리치고 탈출을 시도했다 실패하고 자결하며 남긴 절명사(絶命詩)를 전해 들은 뒤 시를 지었다. 이엽은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로 잡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엽이 남긴 절명시다. 


봄은 동녘에서 오는가 한(恨) 많은 봄이로세.

바람

너는 서녘으로 가느냐 맘만 들떠 바쁘구나.


새벽달

어버이 한숨 실은 새벽달일세

밤길도 더듬더듬 헤매신다지.


촉대(燭臺)로 새운 밤을 그 누가 알랴

그 누가 알랴. 

아침 햇빛에 복바치는 새 설움을!


글방 옛터에 피고 진들 누가 알리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고.


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 뼈

어찌타 짐승놈(牛羊)들과 섞일 수가 있느냐!

(이을호, 2015).


아래는 강항이 이엽의 절명시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지은 시다. 이 시에서 영감을 얻은 강항의 제자들이 '간양'(看羊)이라는 말을 가져온 것으로 본다.  


명의(名義)를 중히 여겨 글을 읽던 나다.

그래도 옳으니 그리니 시비도 많으리오.

요동학(遼東鶴)이란 웬 말 내게는 당찮아

바닷가 양떼를 치나니 죽지 못해 사는 거야. (이을호, 2015).


원래 ‘간양’이란 소무목양(蘇武牧羊), 즉 소무가 양을 친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소무는 北海(현재의 바이칼호) 근처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 흉노왕의 항복 권유를 거부해 억류되어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 19년 만에 귀환했다. 이 고사는 이민족의 회유에 굴하지 않는 충절을 끄집어내기 위해 차용되어 왔다. 제자들은 스승 강항이 2년 8개월 동안 왜군의 포로로 생활했지만 굴하지 않고 조국에 대한 애국과 충절을 실천했다는 의미로 '간양록'이라는 책 제목을 사용했다.


강항의 후학들이 스승을 중국의 '소무'에 비유하기 전에 일본 사회에서 강항을 '오늘날의 소무'((今蘇武)로 평가하고 있었다.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기 위한 사전답사 차원에서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는데 현지에서 사절단 일행이 현지인들로부터 강항을 소무로 비유하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강항을 지조의 아이콘으로 여기는 '소무'로 비유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 대강의 연유는 이러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關原合戰)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추종세력을 물리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1603년 막부를 개창하였다. 이에야스는 조선과 국교회복을 하고자 1599년부터 23차례나 강화사절을 조선에 보내왔다. 일본이 전쟁 후 끈질기게 국교 재개를 위한 노크를 했지만 조선은 일본을 불구대천지원수로 생각하고 국교를 재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조선에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명은 전란의 후유증으로 쇠퇴해 가는 반면, 만주 여진족이 후금을 건설하여 명과 조선을 위협하는 새로운 정세가 전개되었다. 이에 조선은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된 북쪽 변경의 안정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평화적 관계가 필요하였다. 전란 중에 잡혀간 피로인을 쇄환하는 문제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하는 조선정부로서는 명분상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남쪽 변방의 안정을 위한 대일 우호의 유지, 새로 등장한 도쿠가와막부의 탐색, 피로인 쇄환이 국교를 재개한 실질적인 동기였다. 조선은 1604년 8월 사명대사 유정을 ‘탐적사(探賊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사명대사는 1605년 3월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직접 만나 그의 강화의사를 확인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는 일본에 먼저 국서(國書)를 보낼 것과 왕릉을 범한 도적을 포박해 보내라는 2개의 조건을 제시하였고, 1606년 11월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와 범릉적(犯陵賊)을 보내왔다(동북아역사넷).


조선에서는 국교 재개를 결정하고 1607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하고, 1609년에는 교린체제의 실질적인 내용을 담보하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였다. '회답겸쇄환사'는 도쿠가와막부의 국서에 회답서를 보내고 피로인의 쇄환을 촉구하는 사절단이라는 뜻이다. 국교재개기에 3차에 걸쳐 파견되었던 회담겸쇄환사는 1617년(광해군 9)과 1624년(인조 2) 두 차례 더 파견되었다.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3번의 회답겸쇄환사와 9번의 통신사 등 일본에 총 12번 사절단을 파견했다. 초기 사절단은 쇄환, 즉 포로 송환이 주 임무였으나 후기에는 일본 막부 인정 등 다양한 명분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1607년 조선국왕의 국서에는 “조선은 일본과 2백 년 동안 교린을 지속해 왔음에도 임진년에 무고한 군사를 움직여 지극한 참화를 일으켰다. 특히 선조의 릉을 파헤친 것은 우리로서는 뼈에 사무칠 정도로 통한스런 일이다. 의리로 말하자면 하늘을 같이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다.(중략) 그러나 귀국이 구례(舊禮)를 회복하고 전대(前代)의 잘못을 고치려고 하면서 먼저 국서를 보내 교류하고자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 양국 생령(生靈)의 복이 아니겠느냐. 이에 사신을 보내 그 뜻에 화답하고자 한다”라고 하면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명시하였다(동북아역사넷). 1607년 5월 제1차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으로 파견되는데 일본에서 사절단 일행은 강항에 대한 일본 사회의 평판에 직접 대해 들었다. 사절단은 조선에 귀국하여 일본에서 강항에 대해 적의 포로가 돼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중국 한나라 무장 소무(蘇武)에 빗대어 '금소무'(今蘇武), 즉 '오늘날의 소무'라고 칭송받고 있는 사실을 조정에 전했다. 강항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강항에 대한 포상을 위해 노력했지만 당파 간의 알력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박맹수, 2010). 

                             

강항이 남긴 간행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658년 후학들에 의해 편찬된 ‘수은집’은 4권 4책 목판본이다. ‘간양록’은 수은집의 4권에 수록되어 있다. 간양록에는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인 적중봉소(賊中封疏), 일본의 지리와 풍물을 보보한 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 포로들에게 알리는 격문인 고부인격(告俘人檄), 승정원에 나아가 여쭌 글을 정리한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환란 생활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 그리고 제자 윤순거가 쓴 발문 등이 실려 있다. 적중봉소와 팔도육십육주도, 고부인격은 선생이 일본에서 조선조정으로 몰래 보낸 글들이다. ‘적중봉소’는 일종의 적정보고서(敵情報告書)다. 전쟁 중인 일본 내부의 사정과 왜 장수들에 대한 인적사항 등이 담겨 있다. ‘팔도육십육주도’는 일본 지도로서 일본의 지리와 풍물들이 적혀 있다. ‘고부인격’은 당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위무하기 위해 쓴 글이다. '예승정원계사'와 '섭란사적'은 조선으로 귀국한 뒤 쓴 글이다. '예승정원계사'는 강항이 귀국 후 승정원에 올린 글이다. 선조를 만나 피랍 및 귀국 전후의 사정을 알린 것을 포함해 일본에서의 생활, 일본의 사정 등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섭란사적'은 적국에서의 환란생활에 대해 적은 것이다. 간양록에는 16세 말에서 17세기 초 일본의 다양한 사정과 현실을 기록하고 장차 국방을 비롯한 조선의 국가 정책에 관한 견해가 들어있다. 이러니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은 강항과 관련된 수많은 책과 자료를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군국주의 일본 그것도 조선에 대한 문화적, 사상적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낸 책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간양록’에 실린 ‘귀국하여 임금께 올린 글’을 간략히 소개하여 본다. 


"전하께서는 장수 하나를 내실 때에도 신중히 생각하셔서 문관이든 무관이든 국한하지 마시고, 품계와 격식으로 예를 삼지도 마시고, 고루한 신의와 사소한 덕행도 묻지 마시고, 이름난 가문을 택하지도 마소서." 


통상을 중시하여 대외 교역이 활발한 일본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기도 한다. “왜인들의 성질이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다른 나라와 통교하는 것을 좋아하여 멀리 떨어진 외국과 통상하는 것을 훌륭한 일로 여깁니다. 외국 상선이 와도 반드시 사신 행차라고 합니다. 교토에서는 남만 사신이 왔다고 왁자하게 전하는 소리를 거의 날마다 들을 수 있으니, 나라 안이 떠들썩한 이야깃거리로 삼습니다. (…) 먼 데서 온 외국인을 왜졸(倭卒)이 해치기라도 하면 그들과의 통교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반드시 가해자의 삼족을 멸한다 합니다. 천축 같은 나라도 매우 멀지만 왜들의 내왕이 끊임이 없습니다.” 


강항은 다양한 방법을 빌어 전쟁의 참화와 일본에서 피로인으로서 보고 느꼈던 사실과 지혜를 국왕에게 보고하거나 견해를 밝혔다. 간양록에는 국가의 인재등용과 외국과의 통상 관계에서도 두루 도움이 될만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강항의 일본에서 포로 생활 중 쓴 글과 조선에 귀국하여 쓴 글들은 이후 조선의 대일본 외교전략 수립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은 말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강항에 대한 추앙과 선양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1980년 9월 1일 자에서 ‘韓·日을 이은 유자(儒者) 강항(姜沆)의 유적을 찾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고, NHK는 1989년 2월 23일 45분짜리 ‘유자(儒者) 강항과 일본’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1990년, 강항이 억류생활을 했던 일본 시코쿠 에히메현 오즈시 중심가 시민회관 앞에 '홍유 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를 세우고, 현창비 옆의 안내문에는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표기했다. 매년 6월 7일에는 강항의 기일에 맞춰 '수은 강항 선생 위령제'를 지낸다. 일본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 성주 아카마쓰 히로마치 기념비에도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항의 후손과 학자들에 의해 강항을 기리는 선양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강항 현창사업회와 연구회도 꾸려져 있다. 강항의 고향 영광군과 강항이 포로 생활을 했던 오즈시는 2001년부터 자매 결연해 교류하고 있다. 오즈시 초등학교 교과서 부교재에는 강항을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소개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수은 강항 선생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매년 영광군 내산서원에서 ‘수은 강항선생 추향제’를 봉향하고, 국제학술세미나도 개최한다. 2019년에는 일본 교토에서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국회도서관 검색창에 '수은 강항'을 입력하면 학위논문 4편, 도서자료 8편, 연속간행물 15편을 알려준다. '간양록'을 입력하면 학위논문 1편, 도서자료 18편, 연속간행물 43편으로 나타난다. 강항 또는 간양록에 대한 연구는 주로 200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강항이 남긴 유산에 대해 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하게 된다. 


조선의 선비가 갖춰야 할 세 가지 덕목에는 도학, 절의, 문장을 꼽는다. 도학은 배운 공부를 실천에 옮기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중시한 참 지식인이다. 절의는 개인의 이익보다 정의를 생각하며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문장은 자신의 철학과 경험을 후세에 글을 남기는 것이다. 오늘날 강항은 전쟁이라는 참화 속에서도 세 가지 선비의 덕목을 실천에 옮겨 지조와 절개를 지킨 유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강항은 백제 왕인 박사 이후 일본에 학문과 문화를 전파한 조선의 문인에 머물지 않는다. 강항이 전쟁 포로 신분으로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조선 유학자로서 충절과 품위를 지키면서 조선의 학문과 정신문화를 일본에 보급, 전파한 업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이유다. 강항은 자신의 호 수은(睡隱)이 의미 하는 것처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조선 선비의 기상을 대내외적으로 높이 드높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와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정서적으로 먼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런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일본이 역사에 진실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 또는 변질하는 부끄러운 짓을 일삼기 때문이다. 일본인들 중에는 강항이 일본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인정하고 그를 유학의 조상으로 선양하는 것을 보라. 우리나라가 일본의 문화에 기여한 바가 어디 강항의 유학 전수뿐이겠는가. 일본의 지도자들은 역사를 겸허하게 직시하면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다. 진실한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일본 총리를 지낸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한 말이다. 적국에서 일본에 선진 학문을 전해주고 일본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정신적 토대를 마련해준 조선 선비 강항의 학덕(學德)과 기상은 오늘날 난마처럼 얽힌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저자는 강항에 대해 공부하면서 일본 여행 계획을 세웠다. 강항이 포로로 잡혀간 지역과 그가 남긴 유산을 탐방하기 위해서다. 강항이 일본의 시코쿠 에히메이현 오즈시(大洲市), 오사카(大阪), 교토 후시미(伏見)에 남긴 그의 유산의 흔적을 좇아갈 날을 기다린다. 저자에게는 인문의 동선을 좇아가는 뜻깊은 여행이 될 것이다. 


이을호. (2015). 《국역 간양록》. 파주: 한국학술정보(주). 

김경옥. (2010). "수은 강항의 생애와 저술활동". 도서문화 제35집. 

박맹수. (2010). "수은 강항이 일본 주자학 발전에 끼친 영향". 도서문화 제35집. 

선조실록 111권, 선조 32년 4월 15일 갑자 4번째 기사.

권경률. (2021).월간중앙. <왜란·호란으로 생이별 수난, 조선 민초들 극복사>. 10월 17일.  

김준태. (2019).중앙일보. 치욕적 왜군 포로의 삶, 강항이 한 죽음보다 중요한 일

남성숙. (2013).광주매일신문. <임란 포로로 끌려가 日에 유학 전파 ‘제2의 왕인박사’>. 7월 19일.

소정현. (2021).《해피우먼 전북》.  <일본에 성리학을 전수해 준 ‘강항 선생’(상편)>. 4월 28일.

정유진. (2019).《남도일보》. <수은 강항 선생의 간양록과 韓·日 선양사업>. 6월 2일. 

간양록》. (1980). MBC 드라마.

《간양록》. (2021). MBC 다큐. 2월 10일.

임란포로 ‘진주시마’의 후예들”》. (2021). KBS 다큐온. 11월 5일.

동북아역사넷. <일본의 정권 교체와 조·일 국교 재개> http://contents.nahf.or.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진왜란피로인 (壬辰倭亂捕虜人)>. https://encykorea.aks.ac.kr/

사단법인 수은 강항 선생 기념사업회 설립취지문. 


작가의 이전글 baker's dozen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