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600척의 전함을 포함한 2만5000명의 병력으로 아테네를 공격했다. 그리스는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대제국을 상대로 대회전을 치렀다. 숫적으로 절대 열세를 보였던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물리쳤다. 전쟁은 숫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헤메로드로이, 즉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하루종일 달려 소식을 전하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필리피데스는 그리스군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약 40km를 달려 “우리 아테네가 이겼다”라는 말을 전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숨졌다. 필리피테스가 절박한 마음으로 승리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뛴 것은 오늘날 마라톤 경기의 유래가 되었다. 뜬금없이 마라톤을 언급한가 싶지만,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소식을 알리는 전령들을 마라톤 평야를 가로질러 아테네 시민들에게 승리의 메시지를 전해 준 필리피테스로 비유하고 싶어서였다.
봄의 전령으로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대기의 온화해진 바람과 땅 위에서 솟아나는 화초들 것이다. 옛사람들은 봄의 전령으로 엄동설한을 이겨낸 매화에 많은 점수를 주었지만, 남이 알아주던 몰라주던 대지를 초록으로 물들이는 여러해살이(다년생) 식물이야말로 최고의 전령이라고 생각한다. 여리듯 여린 식물들이 아직 녹지 않은 땅 속에 자리 잡고 새싹을 틘 전경을 보노라면 가던 발걸음이 저절로 멈추고 한동안 바라보며 감동에 젖는다. 저자는 매화가 난초, 대나무, 국화와 함께 사군자(四君子) 중에 하나로써 고결함을 상징할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사람들 발아래 밟히면서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화초들도 사군자의 고결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본다.
둘째로는 봄비다. 늦가을 비가 겨울을 재촉하는 비라면, 늦겨울 비는 새봄을 재촉하는 비다. 봄비는 강렬하지도 억척스럽게 내리지 않는다. 자주 내리는 보슬비가 아직 녹지 않은 차가운 대지를 뚫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화초들에게 힘을 보탠다. 그렇게 내린 봄비는 일필휘지로 휘호를 써 내려가는 서예가처럼 대지를 초록으로 물들이게 된다.
봄비를 서정적인 감성으로 시를 지은 시인이 있다. 고등학교 은사님이자 시인이셨던 이수복 선생님의 <봄비>다. 영문학자였던 선생님은 농촌에 찾아온 봄의 전경을 서정적인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하였다. <봄비>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는데, 그런 은사님에게 배운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봄비가 내리면 은사님의 시를 읊조리곤 했는데, 어쩌면 현대시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하는 몇 되지 않은 시일 것이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시인은 농촌의 봄을 상징하는 주제어로 땅에서는 푸르른 보리밭과 아지랑이, 그리고 하늘에서는 새들의 지껄이는 소리로 함축했다.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는 아련한 슬픔이 깃든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놓은 것 같다. 시어의 시각적인 효과다. 혹한의 추위를 견디며 얼마나 기다렸던 새봄과 새싹의 풀빛이겠는가. 사람 사이에도 너무나 기다리던 사람을, 너무나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면 눈물이 나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이제부터 봄에 세상밖으로 나오는 풀의 이름은 서러운 풀빛이라고 해봄직 하다.
셋번째 봄의 전령은 농부들의 바쁜 일손이다. 사실, 농촌에서 봄을 체감하는 것은 농부들이 비료를 구입하여 논과 밭에 가득 싸놓는 것에서 시작한다. 2월 중순에서 3월 초 사이에 농촌 들녘을 가서 보아라. 수십, 수백 포의 다양한 비료가 팔레트 위에 놓여 땅에 뿌려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농부들이 본격적인 농사철을 대비하여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비료를 준비하는 것이다. 예전처럼 봄에 파종을 위해 새끼 꼬고 농기구 점검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화된 농촌에서 농부가 준비한 비료는 장인이 작품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갖춰놓은 공구와 같다.
이렇게 새봄의 전령들이 필리피테스처럼 봄소식을 전할 때 '봄에 피는 꽃을 시샘하는 추위', 즉 꽃샘추위가 찾아온다. 올해도 여지없이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꽃샘추위는 우리말 중에 가장 시적일 것이다. 기득권 세력인 겨울이 새봄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이양하기 전에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고 질투하면서 변덕을 부리는, 마치 작은 반란과도 같은 날씨다. 저자도 봄의 문턱을 넘어도 한참 넘은 시절에 어김없이 찾아온 추위에 <꽃샘추위>라는 주제로 시 한수를 적어본다.
새봄이 왔던가 했는데
추위가 물건너가는 줄 알았는데
어김없이 올 것이 왔다.
그러면 그렇지.
소란스럽게 바람을 일으키고 눈을 뿌려 대지를 꽁꽁 얼릴듯한 기세에
땅 위로 용솟음쳤던 새봄의 전령들
진퇴양난의 위기를 맞았지만
대세는 이미 결정되었다.
시샘하는 추위는
봄의 향연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사절단 같다.
며칠 만에 하늘과 대지는 평온을 되찾고
역발산기개산( 力拔山氣蓋世)의 봄의 정기는
한껏 더 거침없다.
올 봄에도 어김없이 꽃샘추위라는 작은 반란이 있었지만 도처에서 필리피테스와 같은 봄의 전령 만화(萬花)들을 마주대하는 즐거움과 환희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이미 대세가 된 봄기운은 대지의 회복 탄력성을 북돋는다. 봄은 '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라고 한다. 새봄을 맞이하여 눈호강도 많이 하면서 역경을 이겨내고 존재감을 드러낸 생명체들과 농번기로의 출발선에 선 농부들에게 박수를 보내주자.
수자, 필립 드 · 헤켈, 발데마르 · 루엘린존스, 로이드. (2009). <그리스 전쟁>. 오태경 옮김. 플래닛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