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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능력을 증명한다는 것

by 염철현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한신은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품행도 그다지 단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신은 장사를 해서 살아갈 능력도 없었고 항상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밥을 얻어먹으며 살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정장(亭長)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는데, 여러 달이 지나자 정장의 아내는 한신을 귀찮게 여겨 새벽에 밥을 지어 이불속에서 먹어치우고 식사 시간에 나타난 한신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은 한신을 업신여기며 싫어했다. 주민들이 박정했다고 탓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허우대가 멀쩡하고 큰 검을 차고 다니는 건장한 청년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빌어먹고 다니는 것도 하루이틀일 것이다.


한신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환경이 어려웠지만 자존감은 대단히 높았다. 그는 현재 자신 앞에 펼쳐진 고난은 밝은 미래를 위한 징검다리라는 강한 신념을 가졌던 것 같다. 한신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하기 전에 자신의 재능을 미리 알려주었거나, 인적 네트워크를 통했다면 밥을 빌어먹을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신은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한신은 빠른 지름길을 놔두고 멀고 힘든 길을 선택했다. 한신 스스로의 재능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첫째는 한신은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한신이 사는 마을의 무뢰배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한신을 비웃으며, “네놈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를 찌르고, 죽음을 두려워하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나가라”고 말했다. 한신은 그 사람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갔다.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는 고사의 유래다. 이 일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으며 겁쟁이로 여겼으며 아예 과부(袴夫)라고 불렀다. 한신에 대한 치욕스러운 낙인이었다. 겁쟁이 한신이라는 낙인은 평생 그림자처럼 한신을 따라다녔다. 이 낙인은 한신이 출세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때가 많았지만, 한신이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초한대전을 치를 때는 유리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겁쟁이로 소문난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유방조차도 놀림감이 되었으니 적들은 얼마나 한신의 군대를 무시하고 경계를 소홀히 했겠는가 싶다.


한신은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성과를 통해 스스로 증명했다. 그 성과는 여기에서 일일이 나열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한신은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군사전략가로 이름을 떨친 명장으로 등재되었으며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초한전쟁의 패권을 결정지었다. 역사가들은 한신을 장량, 소하와 함께 한초삼걸(漢初三傑)로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훗날 초나라 왕에 오른 한신은 신하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무뢰배와 겪었던 일을 회고하면서 "그때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죽였다면 죄인으로 쫓겨 다녔을 것입니다. 그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참아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신은 그 무뢰배들을 불러 보복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부하로 삼았다고 하니 한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한신은 그때의 치욕을 견뎠던 힘이 자신을 성장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과하지욕의 1차적 의미는 남의 가랑이를 기어가는 치욕이지만, 한신은 '큰 뜻을 지닌 사람은 쓸데없는 일로 남들과 다투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승화시켰다.


둘째는 한신이 항량과 항우 진영에서 경호와 의전을 담당하는 집극랑이라는 하급장교로 있을 때였다. 항량은 반진(反秦) 세력의 총사령관이었는데 진나라의 명장 장한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뜻대로 풀려가지 않았다. 한신은 항량에게 병법을 말할 기회가 있었고 과연 그의 뜻대로 되었다. 향량은 한신을 다시 보고 한신의 가문과 병법을 어디서 배웠는가에 대해 묻지만, 한신은 자신이 무명소절이라 감히 말씀드릴 수 없다고 답했다. 중국 드라마 <천하의 명장 한신>(2011)에서는 한신은 당시 유명한 병법가 사마균에게 병법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고, 사마균은 항량도 잘 알기 때문에 한신이 스승의 이름만 댔어도 그는 더 높은 직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한신은 끝내 밝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추천이나 배경으로 출세하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여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셋째는 한신이 항우 진영을 떠나 파촉의 유방에게 갔을 때다. 장량은 유방에게 대원수감을 추천하기로 약속하고 그 인물을 물색하던 중 항백의 서재에서 우연히 한신이란 인물을 발견한다. 장량은 한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소하에게 추천장을 써준다. 물론 소하와 나눠 지니고 있던 증표를 주었다. 이제 한신은 유방 진영에 도착하여 소하를 만나고 장량이 준 증표와 추천장을 보여주면 대원수가 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한신은 출세의 빠른 지름길을 놔두고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하급관리로서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난 승상 소하는 한신의 능력을 여러 각도에서 시험한 결과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유방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유방은 한신이란 인물은 고작 항우 진영에서 집극랑이라는 하급관리를 지냈다는 것과 고향에서 무뢰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간 겁쟁이 정도로만 알았다.


한신은 소하의 거듭된 천거에도 유방이 받아주지 않게 되자 파촉을 떠나려고 도망쳐 나왔다. 이를 전해 들은 소하는 미처 유방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한신을 쫓아가 데려왔다. 소하는 유방에게 한신은 국사무쌍(國士無雙), 즉 나라에 비견할 자가 없는 선비라고 추겨세우며, 유방이 한중에서 계속 왕노릇을 할 것이라면 굳이 한신을 쓸 필요는 없지만 천하를 다투고자 한다면 한신이 꼭 필요하다고 천거했다. 이제 유방도 마음을 바꿔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할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까지 되자 한신도 더 이상 장량의 추천장과 증표를 숨길 수 없어 소하에게 보여준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능력을 증명해 보인 한신의 남다른 성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최고의 지위에 올랐던 한신도 인간적인 결함을 노출시켰다.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멋대로 전쟁을 벌이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적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일례로 한신은 제나라 정벌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불필요한 전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유방의 일급 책사 역이기를 죽게 했다. 사마천은 한신이 겸양한 태도로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으면 주공, 태공망에 비길 인재였으나 그러지 못하여 자멸했다고 평하였다. 자기 스스로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그 자부심은 오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한신이 인간적인 결함으로 스스로 무덤을 파고 생을 마감한 지 400여 년 후에 촉나라의 관우 역시 과도한 자부심과 남을 무시하는 오만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누구든 자부심이 지나치게 높고 오만무도하면 생의 끝줄에 왔음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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