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는 시간이 자유로워서 참 좋겠어요"
본격적으로 강의를 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두고도 1년여 만에 나는 프리랜서로 나와버렸다.
직업이 뭐냐고 할 때 "프리랜서로 강의해요~"라고 답하면 반응은 으레 둘 중 하나였다.
"어떤 강의하세요? 영어?"
이거나
"프리랜서는 자유로워서 좋겠다~"
였다.
맞다.
프리랜서는 시간이 프리(free)하다.
그리고 시간이 프리한만큼 통장도 프리(free)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입금되는 곳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늘 불안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이번달 달력에 아직도 빈칸이 하나라도 있으면 불안해 졌다.
다음달 달력에 빈 칸이 몇개라도 보이면 불안해 졌다.
다다음달이나 다다다음달 일정이 서너개라도 잡혀있지 않으면 불안해 졌다.
'어떻게든 다이어리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은 잘나가는 주위 다른 강사들을 보면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주위 강사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불안해 했으며, 스무살 무렵부터 대학생이었지만 프리랜서MC 활동을 하면서도 비슷했으니 말이다. 일정이 없으면 잡아야 했다.
그렇게 2~3개월치 다이어리에 일정이 빼곡히 채워지고 섭외 전화가 왔을 때
"어쩌죠.. 그 날은 제가 다른 일정이 있네요. 죄송합니다. 혹시 다른 날은 어떠실까요?"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 스스로 뿌듯해 하기도 했다.
불안은 무뎌질거라고 생각했다.
불안도 습관이 될거란 걸 몰랐었다.
불안에 삼켜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몸에 이상신호가 온 것은 3년차였고, 마음에 이상신호가 온 것은 5년차였다.
그제서야 습관이 되어버린 불안에 몸도 마음도 닳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도 물어볼 곳도 없었다.
처음에는 몸의 치료를 위해 병원엘 갔다.
원인도 모른채 몇달을 이 병원, 저 병원 끌려 다녀야 했다.
새벽이면 기어서 들어갔던 응급실에서는 의사들마다 해 줄 것이 없다며 지난번보다 강도 높은 진통제만 처방해 줄 뿐이었다. 몸이 아프자 불안은 더 심해졌다. 이제는 일정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큰 병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 다시는 일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별별 생각들로 머릿 속에 온갖 망상들이 들어찰무렵 겨우 원인을 알게 되어 제대로된 항생제 처방을 받을 수 있었다. 수술은 필요하지만 관리만 잘 해준다면 괜찮다는 소견을 받고 이제부터 건강을 잘 관리하겠노라 다짐했었다.
그 다짐은 고작 몇달정도 유지되었다.
식사를 거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밤을 새는 일은 식은죽먹기가 되어버린 일상.
아프기 전과 뭔가 달라진 것을 느꼈지만, 오랜만이라 그런 줄 알았다. 몇년정도 경력이 쌓여 익숙해 져서 그런 줄 알았다. 다들 그저 그렇다니 그런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 때즈음 정말 우연히, 운이 좋다면 좋게 대학원에 가게 되었다.
낯을 가리는 탓에 처음 간 MT에서 겉으로만 돌던 내 손을 붙잡아 곁에 앉혀 두고는
"너 이제 일하지 말고 여기 앉아서 이거 먹어!"
라고 말하는 동기 언니가 얼떨떨했고
"야, 얘 일 시키지마!"
"그래, 그런건 언니들이 하는거야. 막내는 그냥 놀아"
한마디씩 거드는 언니들의 말에 어쩔줄 몰랐다.
스무살 무렵부터 일을 하며 언니들 틈에서 눈치껏 행동해야 했다. 일거리가 보이면 달려가 언니들이 하는 모양새를 보고 흉내내며 일을 배웠다. 그러면 다들 좋아해줬다.
그래서
"일 야무지게 잘하네! 그럼 이것도 부탁해~"
라는 반응이 더 익숙했다. 이게 인정받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늘 일이 많은 편이었다. 일이 많은 것이 마음은 편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래도 된다니.
더 정확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존재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됐다.
일을 하는 것보다 학교에 있는게 마음이 편했다. 학교를 핑계로 일을 조금씩 줄여갔고, 일이 줄어든 덕분에 통장도 같이 다이어트를 시작했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그냥 그 때는 그게 좋았다.
처음으로 일이 없어도, 일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불안이라는 습관에서 벗어날 준비를 시작한 것 같았다.